대체 얼마 만에 <이퀼리브리엄>을 본 건지 모르겠다. 디비디 시절에 보고 안 봤나? 그럼 <이퀼리브리엄> 블루레이는 그저 내 블루레이랙에서 먼지를 쌓아두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건 꽤나 끔찍한 이야기라서 믿고 싶지 않다. 보긴 봤겠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일 뿐.
그러니까 아득한 기억의 너머에서 <이퀼리브리엄>을 끄집어내보면 '스타일리쉬하다'는 감상이 제일 먼저 끌려나온다. 그런데 오늘 감상한 <이퀼리브리엄>은 분명히 스타일리쉬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저예산의 한계를 어떻게든 깨려고 조명과 편집의 트릭을 잘 이용한 게 저화질의 그 시기엔 먹혔던 모양이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퀼리브리엄>의 스타일은 '쌈마이'에 가깝다. 특히 <이퀼리브리엄>의 테마곡 활용 방식은 이제 일본의 3D OVA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반대로 말하면 일본 OVA 업계가 <이퀼리브리엄>의 2002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폭삭 고여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액션 측면에선 당시 기준으론 참신함이 분명히 있다. 집을 습격한 경찰과의 격투, 반군을 도와 탈출하는 장면의 격투에선 무에타이를 사용했고, 마지막 건카타 액션은 나이프 대신 권총을 들고 칼리 아르니스의 플로우드릴을 써먹는다. 너무 기초적인 것들이라 지금에 와선 놀랍지 않지만, 당시엔 <본 아이덴티티>나 <헌티드> 같은 영화를 제외하면 비슷한 종류의 무술을 사용한 영화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제임스 본드조차 우쌰우쌰하며 주먹질하던 시절이다.
'감정'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감정을 억제해버린 사회의 이야기 역시 익숙하다. 당시에도 아주 신선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에 와선 더욱 그렇다. 게다가 일본에서 비슷한 소재의 <사이코패스>가 대박을 치는 바람에 어린 아이들이 <이퀼리브리엄>을 보면 하나 같이 <사이코패스>가 떠오른다고 말한다던가. 그도 그럴 게 <이퀼리브리엄>이 세상에 나올 당시 전소미가 1살이었고, 아이즈원의 안유진과 장원영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쯤되면 고전영화다.
세월이 흐름으로써 신선함이 잊혀지는 영화야 수도 없이 많지만, <이퀼리브리엄>은 어째 무기 전부를 뺏긴 듯하다. 시간의 풍파가 전신을 타격했고, 남은 건 중반부까지 스릴 가득한 전개뿐이다.
한편, <이퀼리브리엄> 블루레이는 영상에 문제가 있다.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의 좌우를 잘라서 16:9 화면비에 맞췄기 때문이다. 이 실수를 처음 저지른 게 캐나다인 모양인데, 그걸 또 본고장인 미국에서 따라해버렸다. 한국에서 출시된 블루레이 역시 북미쪽의 소스를 가져온 것인지 좌우가 잘린 16:9 화면비다. 즉, 이 영상을 두고 블루레이 화질을 논한다는 건 애초부터 글러먹었다는 얘기다. 현시점에서 한국인이 정상적인 영상의 <이퀼리브리엄> 블루레이를 구매할 가장 쉬운 방법은 일본판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하 스크린샷은 <이퀼리브리엄> 한국판 블루레이의 원본 사이즈 캡쳐다. 누르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