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중문화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를 되새겨봤다. 물론 시작은 애니메이션이었을 거다. <아키라>, <공각기동대>, <패트레이버 극장판>을 불법판(!) 비디오로 질리도록 봤었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바이블에 가까웠다. 만화책도 있었다. 내가 자란 세대는 일본 만화 열풍과 마주했던 세대다. <닥터 슬럼프>, <드래곤볼>, <슬램덩크>, <도라에몽>은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부터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건 관심이라기보다 흐름이었던 것 같다. 그냥 주변에서 인기가 있고 재미있으니까 일본 대중문화라는 인식조차 없이 그냥 즐겼던 게 아닐까 한다. 실질적으로 내가 일본 대중문화에 관심을 지닌 결정적 계기는 일본문화 개방 이후에 본 키타노 타케시 감독의 영화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그 싱그러운 영화들을 본 뒤, 키타노 타케시 감독의 폭력 가득한 영화들을 보면 이게 정말 같은 나라의 영화가 맞나 싶은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 갭(모에?)에 빠졌던 듯도 하다. 비슷한 시기 보게 되었던 <원령공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극대화된 폭력적(!)인 작품인 데다 그간 '자연 만세'를 외치던 지브리에서 가치모호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마음 속 일본 대중문화의 인상이 뒤바뀐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와서야 '일본 대중문화를 접하고 있다'는 감각이 생겨났다. 일본이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간에 한국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퀄리티와 다양성의 문화를 전세계에 퍼트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나 역시 자신도 모르게 일본의 대중문화에 빠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놀랍게도 지금 우리나라의 10대에게 일본 대중문화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의 일본은 내수 시장의 거대함에 취해버린 건지,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 때문에 흐르기를 거부해버린 건지 갈라파고스나 고인물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대중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내게 일본이란 나라의 인식을 만들었던 영화 분야는 이젠 말라서 물기조차 희미한 고인물이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제작 시스템 개혁을 말하고 있지만, 이 합리적인 지적을 영화계의 윗사람들은 그저 비웃을 뿐이다.
일본 대중문화를 대표한다는 애니메이션도 지금 현재진행형인 <케모노 프렌즈>로 제작 시스템 자체가 심각하게 고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여전히 세계를 재패하고 있는 일본 만화 역시 한국의 10대 사이에선 그다지 큰 비중을 지니지 못 한다. 일부 만화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대부분 불법으로 소비하고 있는 데다 이제 한국의 웹툰을 훨씬 많이 본다고 한다. 해적판으로 수천 만 부를 팔아치웠던 <드래곤볼>의 영광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듯하다.
20년 전 누군가가 이러한 현상을 예견했다면, '얼씨구 놀고 앉아 있다'라며 핀잔을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케모노 프렌즈> 사태는 인터넷의 발전 덕분에 현실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비슷한 일은 이전부터 일상처럼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거대 자본을 손에 쥐고 있는 윗물이 저토록 망가져있는데 어떻게 변하겠느냔 말이다. 이건 얼마 전 최악의 형태로 일단락된 NGT48 사태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이런 일본의 현실을 길게 언급한 이유는 요새 엉뚱한 자만심에 취해있는 사람이 많아보여서다. 근래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조금 괜찮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흐르는 물의 깨끗함과 혼혈의 건강함을 잊는 순간 대중문화는 무너진다. 다른 나라와 주고 받는 걸 멈추면 안 되고, 우리 것에 다른 것이 섞이는 걸 꺼리면 절대 안 된다. 최소 40년 동안 미국 다음으로 뛰어난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던 일본이 갈라파고스가 되어버리는데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빈약한 것들이 많은 우리나라의 대중문화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