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몇개월 동안 일본 대중문화의 갈라파고스화와 거기에 허우적대는 일뽕들을 열심히 팼으니, 이번에는 조금 위태한 케이팝 우월주의에 대해 언급해보려고 한다. '케이팝은 이제 다른 아시아의 대중문화보다 우월하므로 다른 대중문화를 외면해도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잦게 보여서다.
한 때, 대한민국 보이 그룹 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쟈니스. 이젠 해산해서 볼 수 없게 된 SMAP는 당시 쟈니스의 간판 스타였다.
대중문화, 아니 그 보다 상위 개념인 '문화'부터가 절대 고여선 안 되는 존재다. 언제나 흘러야 하고 변하고 진화해야 한다. 케이팝은 그 증거물이다. 가끔 케이팝을 마치 아무런 베이스도 없이 탄생해 발전한 음악적 성취라 여기는 어린 친구들이 있는데, 그거 정말 심각한 오해다. 케이팝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문화 자체가 미국, 일본의 그것을 쫓으면서 발전했고, 한국 스타일로 소화하면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다. 케이팝은 제이팝 특히, 쟈니스의 시스템을 베이스에 깔고 시작된 부분이 굉장히 많은 데다, 제이팝을 마냥 따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식(지금 한국의 연습생 시스템은 제이팝의 그것을 넘어서 유소년 스포츠 클럽에 가까운 형태다)으로 풀어낸 뒤 북유럽과 북미의 음악 스타일까지 뒤섞어 만든 혼종이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의 청결함과, 혼혈 유전자의 건강함이 배합된 결과물이란 의미다. 그런데 케이팝 우월주의자들은 자꾸 케이팝이 흐르는 걸 막으려 든다.
막으려 드는 이유를 살펴보면 굉장히 황당하다. '이제 다른 나라에서 배울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미나 유럽의 대중문화라면 또 모를까, 아시아권에선 이제 배울 게 없으므로 무시하고 우리 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슬픈 이야기를 하자면, 대중문화는 '스탠드 얼론'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열악한 처지에서 탄생한, 한 발 뒤처진 대중문화라고 해도 배울 게 있는 데다 단 하나의 장르만으로 성립하는 대중문화가 없다는 얘기다. 즉, 대중문화에서 배울 게 있느냐 없느냐는 가전제품 성능 체크하듯 비교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다.
갈라파고스화되었다곤 해도 여전히 명감독이 쏟아져나오고, 명작들이 쏟아져나오는 거 보면 일본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배울 게 없을 리가.
우월함을 자랑하다 고여버린 대중문화가 어떻게 되는지 바로 옆나라 일본이 말해주고 있다. 항상 세계적인 인기를 누려왔던 일본의 대중문화는 이전의 에너지를 잃고 갈라파고스화되었다. 주변 나라의 문화에서 배울 걸 찾거나 교류를 하는 걸 거부하고 내수 시장의 거대함에 만족하며 노후한 시스템(예: 제작위원회)에 변화를 주는 것마저 두려워하다 고여버렸다. 일본 대중이 질려하니까 억지로 시작한 변화도 결국, 70~90년대에 자신들이 했던 걸 리메이크하는 수준이었고, 그것마저 질려하니 어쩔 줄 모르다 그제서야 주변국을 둘러보기 시작한 것이다.
케이팝 인기의 태동기, 일본에 신한류라 불리는 큰 흐름이 생겼다. 일본 대중이 왜 갑자기 케이팝에 환호했느냐. 케이팝이 제이팝을 비롯한 각종 대중문화의 흐름을 포함하고 있었던 덕에 '익숙함'과 '신선함'이 다 존재했기 때문이다.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접근했더니 신선하기까지 하다니. 결국, 이는 외국의 와패니즈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케이팝이 유럽과 남미에 알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럽의 초기 케이팝 팬들이 대부분 제이팝에 관심을 두던 이였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혼종. 이것보다 더 매혹적인 건 없다.
일본 대중이 고여버린 자국의 대중문화 스타일에 얼마나 피곤해있었는지는 무술 감독 켄지의 성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카타나를 들고 싸움질하는 찬바라의 무술 안무가 항상 비슷해서(그게 완벽한 고증이라면 말을 안 하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질렸던 일본 대중은 단검 무술을 카타나에 적용한 켄지의 무술 안무에 환호했다. 견자단 사단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아온 그의 무술 안무는 조잡한 수준과 별개로 분명히 신선했고, <바람의 검심> 트릴로지와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 등에서 힘을 발휘한다.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 업계는 뒤늦게 일본이 무술 안무 측면마저도 고인물이 되어 썩어간다는 걸 깨닫고, 약 5년 전부터 한국이나 중국, 미국의 무술 감독들을 섭외하거나 그들로부터 노하우를 배우기 시작했다. (웃기는 건 일본도 B영화 쪽에서 활약하는 무술 감독들 중 뛰어난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저 묻혀져있었을 뿐이다.)
조잡하지만 신선했던 무술 안무와 다르게 영화 자체는 (재미와 별개로) 고인물에 가까웠던 <바람의 검심>. 그래도 이 영화가 만화 원작의 고인물중에선 볼 만하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대중문화가 고인물이 되어 흐르길 거부하고 우월함만 내세우면 어떻게 되는지 바로 옆나라에서 말해주고 있다. 옆나라는 전세계에 와패니즈를 양성했을 만큼 수십년 동안 대중문화의 다방면에서 압도적인 결과물을 보여온 나라다. 아직 수명이 10년도 안 되는 케이팝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강렬함을 자랑했다. 그런 그들조차 갈라파고스가 되어 이젠 한국 대중문화를 벤치마킹하네 마네 하는 얘길 하는 마당에, 다른 나라의 대중문화에서 괜찮은 점들을 열심히 받아들여 발전해온 케이팝이 '우리가 우월하니까 안 배워도 돼'라는 얼토당토 안 한 이유로 고인물을 자처한다? 그건 망하는 지름길이다.
어차피 회사들이 팬들의 의견에 끌려가진 않을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 회사들은(영세한 회사일 수록 더욱) 팬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특히 지금처럼 일본, 중국, 태국과의 관계가 안 좋은 상황에서 그쪽 나라의 무언가에 관심을 지니고 배울 생각을 했다간 난리가 난다. 케이팝 우월주의에 빠진 팬이 많으면 많을 수록 다른 무언가를 배우는 걸 겁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꽉 막힌 우월감'이란 중독 증세를 지닌 전염병이다. 회사들도 전염될 수 있다.
우월해서건, 겁이 나서건 간에 흘러가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문화의 본질을 외면하면 끝이다. 열린 마음까진 안 가지더라도 흐름을 막는 행위는 그만둬야 한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건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라의 탄생 자체가 온갖 인종과 문화의 통합이었던 덕에 대중문화 역시 엄청나게 다양할 수 있었고, 이후엔 적국이었던 일본이나 일개 도시에 불과했던 홍콩의 대중문화까지 깡그리 가져다가 미국식으로 소화했다. 어떻게든 새로운 걸 찾으려는 미국의 잡식성은 그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습성이다. 산업 혁명 직전까지 갔음에도 화약의 발전이나 바다 진출을 두려워하다 정체되었던 명-청 시대의 중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꼭 기억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