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공작을 하고자 하면,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공작을 하다간 덜미가 잡혀서 역풍을 맞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드물게 그런 준비없이 벌이는 공작이 먹히는 때도 있다. 짧은 기간에 여론을 끌고 다니며 몰아칠 필요가 있는 경우가 그러한데, 딱 <프로듀스48> 방영 기간이 딱 그게 가능한 환경이었다. <프로듀스48>이 방송될 때 여론 몰이를 위해 탄생한 '위스플'이라는 희대의 괴작은 그런 경우의 표본 같은 녀석이다.
위스플이란, 위에화, 스타쉽, 플래디스를 묶은 약칭이다. 이 세 개의 회사를 비롯한 여러 회사가 CJ와 깊게 연결되어있고, 이 때문에 <프로듀스48>에서 위 회사 소속 연습생들이 크게 이득을 봤다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이를 '위스플 프레임'이라 부른다. 이런 유형의 프레임 대다수가 그런 것처럼 위스플 역시 '억지'로 기둥을 세우고 '추측'으로 벽돌을 쌓은 뒤 '거짓말'로 포장한 결과물이었다.
일단 위스플 프레임에 포함된 회사들을 CJ 계열사로 인식한 이유는 CJ 계열사를 통해서 음반을 발매했거나 그런 회사와 친하기 때문이다. 즉, 독립 음반사를 갖출 여력이 안 되는 회사들이 CJ 소속 레이블로 음반을 낸 걸 '회사가 CJ 계열이다'라고 착각을 하고 이것저것 기워붙여 엮어낸 셈. 왜 이런 착각을 했느냐. <프로듀스48>에서 좋은 분량을 조금이라도 가져간 연습생이 소속된 회사들의 공통점을 찾다보니까 기껏 하나 발견한 게 음반 레이블이었던 것. 발견한 사람은 만세를 외쳤을 거고, 같이 프레임을 짜던 이들은 냉큼 주워서 사방팔방에 퍼트렸다. 이런 엉뚱한 주장은 기사화까지 되어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를 차지하는 등 엄청난 파급을 일으켰다. 무척 엉뚱한 일이다. 우리나라 기획사 중에 독립 음반사를 지닌 회사가 거의 없다시피한 마당에, CJ 계열 레이블을 쓴다고 CJ와 유착 관계라 주장한다면 CJ는 이미 한국 연예계의 7~8할을 집어삼킨 셈이 된다.
위스플 프레임의 최대 피해자 이가은
게다가 위스플의 '스'에 해당하는 스타쉽은 레이블조차도 CJ와 관계가 없었다. 스타쉽은 카카오 계열의 회사고, 당연히 그쪽 레이블을 이용한다. 위스플 프레임에 엮어 넣으려고 다른 회사들을 뒤지다가 정작 대표랍시고 넣은 스타쉽을 까먹었던 걸까? 사실, 스타쉽이 위스플에 들어간 이유도 황당하다. 위에화가 CJ의 중국 측 파트너라서 두 회사가 친하고, 스타쉽은 그런 위에화와 함께 '우주소녀'란 그룹을 런칭했기 때문이란다. 이쯤되면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친구. 우린 다 친구. 지구는 하나.'가 위스플의 정체가 아닌가 싶을 지경.
정말로 CJ 계열의 회사들이 <프로듀스48>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고 여겼고, 이를 응징하겠다는 생각이었다면 위스플에서 '스'를 스타쉽이 아닌 스톤 뮤직으로 했어야 했다. 스톤 뮤직은 진짜로 CJ의 계열사다. 여기에 CJ와 아주 깊은 관계인 플레디스를 포함해 '플스'로 밀어야 했다. 그렇게 스톤 뮤직과 플레디스만 넣었다면 나 역시 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스플을 만든 이들은 좋은 분량을 더 차지한 연습생이 소속된 회사들을 최대한 몰아넣느라 정신이 없었고, 프레임은 허황된 만큼 거대해졌다.
그러나 이 괴상한 프레임이 제대로 먹혔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습생을 데뷔시켜주기 위해 목숨(...)을 거는 방송이다. 다른 연습생이 떨어져서 내 연습생이 데뷔할 수 있다면, 어떤 끔찍한 거짓말도 다 모르는 척해줄 수 있는 서바이벌이다. 위스플 같은 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도 안 되는 건데, 관계 없는 연습생의 팬들은 그걸 검증해보지도 않고 그냥 흘려보냈다. 위스플 프레임에 포함된 연습생의 팬들이야 미칠 지경이었겠지만, 포함되지 않은 연습생들은 희희락락. 특히 한국인 연습생들에게 실력으로 뭉개지며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긴 일본인 연습생의 팬들은 모르는 척했을 뿐 아니라, 위스플 프레임을 만든 이들을 지지하며 사방팔방 퍼트리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제대로 먹혔고, 위스플 연습생들의 순위가 폭락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반전이 일어난다.
위스플 프레임으로 타격을 입은 연습생들은 대부분 상위권 연습생이었다. 좋은 분량이 방송에 나간 것도 대체로 실력이 뛰어나거나 비주얼이 좋거나 캐릭터가 확고하거나 셋 중의 하나. 즉, 뭐가 어떻든 데뷔해도 좋을 법한 무언가를 지닌 연습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위스플이 너무 잘 먹혀서인지 그 뛰어난 연습생들이 데뷔권에서 빠져나가거나 탈락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위스플이란 엉뚱한 프레임으로 얻어맞은 팬들도 질려버린 채 탈주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오자 그제야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 건지, 위스플을 끝없이 외치던 사람들도 서서히 조용해졌다. 주요 보컬리스트, 댄서들이 전부 미끌어지고 나서야 그대로 데뷔조가 나왔다간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거란 걸 깨달았던 게 아닌가 한다.
위스플 중 플에 해당하는 플레디스는 전원 탈락. 경악스런 결과였다.
위스플이란 단어가 소멸하다시피했던 <프로듀스48>의 마지막 주. 위스플로 끌어내리는 행위가 사라지자, 데뷔조인 아이즈원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 수준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주의 온라인 투표가 겨우 100만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기적의 데뷔조'라 불리며 지금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즈원을 보며 사람들은 뒤늦게 말한다. "대체 위스플 그건 뭐였어?"라고. 한참 위스플로 엉망진창을 만들던 사람들은 다 어디갔는지 알 수 없고, 이제 위스플의 흔적은 자신이 위스플을 만들어냈다고 밝힌 이들과 아직도 위스플을 굳게 믿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만 살짝 확인할 수 있다.
되새겨보면 정말 무모한 짓이다. 그런 거짓으로 엮다가 CJ가 방송이 끝나자마자 고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심지어 위스플 만드는 과정에 일조했다고 주장한 어느 팬은 "난 이가은(플레디스)을 떨어트리는 게 목적이었어"라고 고백을 했다. "소속 연습생의 이미지가 있으니 고소까지 갈 리 없다"고 말하던데 그건 힘들게 서바이벌에 임하고 있는 연습생들을 볼모로 잡고 악당 노릇을 한 꼴이라 섬뜩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방송 이후에도 위스플을 잃지 못 하던 사람들은 기어이 나무위키에서 위스플에 대한 반박 문단을 통째로 삭제하는데 성공했다. 방송이 끝나고 2개월 만에 이뤄낸 쾌거. 존경스러울 정도의 정신승리와 집착이란 말 밖에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