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걸그룹

그렇게, 나인뮤지스의 해체를 지켜보면서

몰루이지 2019. 3. 12. 18:00

 나인뮤지스가 해체한 게 오조오억년 전인데 이제와서 글을 올리느냐며 이상하게 여길 분도 있겠고, 저 역시 이런 제가 좀 이해가 안 갑니다만, 추억을 소회한다는 게 마냥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나인뮤지스의 경우는 우여곡절이 너무 많아서 지칠 지경이었던 그룹 아니겠습니까. 그런 탓에 길게 글을 늘일 재능도 의지도 없는 상태라 빈곤한 포스팅이 될 테니 이해하시길.


 런칭했던 당시 나인뮤지스는 어설픈 기획 그룹이었습니다. 세라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170cm를 넘고, 세라 역시 167cm 이상이라는 멤버 구성은 '모델돌'이란 컨셉에 딱 어울리는 만큼이나 비이상적이었죠.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키가 162cm 정도일 겁니다. 지금도 걸그룹 멤버 중에 170cm를 넘는 멤버는 대단히 장신이란 얘기를 듣습니다. 얼마 전에 <프로듀스48> 당시 일부 정병에 심하게 걸렸던 일본인 연습생 팬들이 170cm 근처에 있는 한국 연습생들을 거인이라느니 너무 커서 그룹에 안 어울린다느니 하는 식으로 공격했지요. 이런 것만 봐도 170cm가 '매우 드문 신장'이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는 170cm 넘는 연습생 중에서 당장 데뷔해도 좋은 실력의 9명을 골라야 하는 건데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실력에서 의문이 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나인뮤지스가 있던 당시엔 이미 9명 걸그룹으로 소녀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회자되는 소녀시대의 칼군무와 가창력은 여자친구가 등장하고 나서야 10년만에 간신히 후계자가 나왔다고 할 정도로 세대를 압도했습니다. 하필 '나인'뮤지스였기 때문에 소녀시대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 잔혹했지요. 스타제국의 우스꽝스러운 기획력은 나인뮤지스를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치기 적절한 수준이었고요. 그런 시점에 분명히 스타제국조차 예상하지 못 했을 일이 일어납니다. 멤버의 탈퇴와 가입 끝에 기적처럼 뛰어난 연습생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했고, 초기부터 남아 있던 멤버들도 각자의 노력으로 준수한 실력을 갖추게 된 거지요.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일찍부터 나인뮤지스의 이러한 변화에 놀랐어요. 그리고 나인뮤지스는 스윗튠의 프로듀싱과 만나 예열 기간을 거친 뒤 <돌스 DOLLS>라른 명곡을 내놓으며 전성기를 열어냅니다.


 이후 나인뮤지스는 연달아서 경이로운 노래, 무대를 쏟아냈습니다. <돌스>로 시작해서 <와일드>, <건>, <글루>로 이어진 나인뮤지스의 충격적 행보는 2013년 걸그룹 업계 최고의 발견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장르, 각기 다른 컨셉, 각기 다른 무대. 보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던 안무 동선과 칼 같았던 댄스의 각. 노래에 볼륨을 넣었던 세라, 현아, 경리, 혜미의 보컬. 전 이 당시 나인뮤지스를 두고 걸그룹이 보여줘야 하는 모든 걸 보여줬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2014년부터 그녀들의 앞에 꽃길이 펼쳐질 거라 확신한 게 저뿐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대형사건인 터집니다. 원년 멤버인 은지와 이샘이 탈퇴한 것. 쭉 뻗어나가야 했던 시점에, 올팬 기조로 유명했던 나인뮤지스에 치명타였지요. 그리고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쐐기가 박혔죠. 나인뮤지스의 노래가 훌륭했던 건 네 명의 보컬 모두가 다른 음색으로 조화롭게 곡을 꾸몄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그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중심을 잡아주던 세라가 그룹을 떠났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던 멤버는 현아였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당시엔 명확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올팬이었습니다. 멤버 모두에게 애정을 주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중에 세 명이나 빠져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특히 세라의 경우는 그룹의 상징 같은 존재기도 했고, 제 개인적으로도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있어서 애정이 조금 더 가는 편이었습니다.* 아끼고 아끼던 멤버 세 명의 탈퇴. 그 중에 한 사람은 그룹의 중심이라던 세라. 2013년에 만들었던 꽃길의 꽃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쓸쓸한 낙엽만이 보이더군요.


*제가 2013년에 나인뮤지스 멤버들의 실력 상승과 새로 들어온 멤버들의 놀라운 재능 등을 끄집어낸 칼럼 비슷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나인뮤지스의 팬이 제 글을 나인뮤지스 멤버들에게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라가 글을 읽고 울어서 깜짝 놀랐다는 후기를 제게 알려주더군요. 이게 진짜인지 어떤지 저로선 알 도리가 없습니다만, 직접 본 것도 아닌 세라가 우는 모습이 머리에 새겨져버렸습니다.*


 이후 금조와 소진을 영입하긴 했지만, 나인뮤지스의 보컬 4인방 중 하나인 현아의 탈퇴, 래퍼로 변신한 뒤 랩도사가 되었던 이유애린, 꽃단애로 유명했던 비주얼 멤버 민하가 탈퇴하는 슬픈 과정을 거쳤고, 이미 실낱 같았던 제 나인뮤지스에 대한 관심은 싹뚝 끊겨버렸습니다. 아직 멤버가 다섯 명 남아있는데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이들도 언제 탈퇴할지 모르는 데다, 멤버가 대거 탈퇴하면서 노래의 스타일도 바뀌었다.'는 저도 안 믿는 대답을 할 것 같군요. 사실은 팬으로 계속 남아있다간 정신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게 진짜 이유였으면서 말입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잊고 살던 나인뮤지스의 이름이 다시 눈에 들어왔던 건 바로 얼마 전의 해체 발표입니다. 해체 소식에 느낀 감정은 미안함. 전 다섯 명만 남은 시점에서 조만간 해체할 거라 확신을 했고, 그래서 더 쉽게 손을 뗄 수 있었던 건데, 놀랍게도 2년 가까이 그룹을 유지했던 셈이더라고요.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매정하게 떠난 팬들을 원망하고 있었을까? 혹시 팬들이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무리해가며 힘들게 그룹을 유지했던 건 아닐까? 등의 걱정으로 점철된 오바육바가 대부분이었지요. 이런 생각 때문인지 나인뮤지스의 마지막 팬미팅 영상을 보는 내내 눈물을 꾹 참느라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멤버들을 보며 감동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복잡한 심경에 글을 쓸 의욕마저 잃어버렸지요.


 해체라는 묵직한 단언과 함께 나인뮤지스는 걸그룹 역사 저편에서 빛나게 되었습니다. 연예계라는 곳이 기적적인 재결합을 꿈꿀 수도 있는 곳이지만, 나인뮤지스의 경우는 탈퇴와 가입이 반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뤄졌을 회사와의 대화, 멤버들과의 찬반 등이 무조건 원만치는 않았을 거란 걸 뻔히 알 수 있어서 기대를 접어두고자 합니다. 이제 제가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나인뮤지스 멤버들이 행복한 기억만 가지고 그룹을 떠내보내는 것. 아니, 안 좋은 기억이 한가득이었어도 최소한 마지막 팬미팅에서 다 희석해냈기를.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지 못 한 팬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