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볼까 고민하다가 대충 아무거나 집어들었더니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블루레이가 잡혔다. 그러고 보니 거의 7년을 안 본 영화다. 혹은 봤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거나.
쿠엔틴 타란티노도 가만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향이 있다. 이게 작업 기간이 길고 각본 수정을 끝없이 하는 감독들의 공통점인데, 처음 기획할 때의 방향성과 몇 년에 걸쳐 각본을 수정하면서 생긴 방향성이 일치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경우 제목만 보면 '바스터즈'의 이야기여야 하지만, 실제론 멜라니 로랑이 맡은 쇼샨나의 이야기나 다름이 없다.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는 역할의 중요성과 별개로 분량만 보면 한스 대령을 맡은 크리스토프 왈츠와 비슷한 정도다. 참고로 이러한 주객 전도는 왕가위의 영화에서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지치는 영화일 수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대화로 긴장감을 주는 방식이라서다. 그게 그의 정체성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다른 작품엔 분위기를 바꿀 액션 혹은 공간 전환 등의 여러 장치를 가득 마련해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선 배우들의 말빨에 상당히 의지한다. 크리스토프 왈츠는 물론이고, 다이앤 크루거, 마이클 패스밴더, 오거스트 딜과 같은 연기론 누구한테 잘 지지 않는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이를 악물고 연기 배틀을 벌인다.
그런 연기력이 좋은 배우들이 잔뜩 모여인 덕에 특별한 장치 없이도 긴장감을 불러오는데 성공하지만, 그걸 2시간 30분 동안 계속해서 반복하다보면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다. 아마 쿠엔틴 타란티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펍 총격씬 이후엔 지쳐서 영화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 자첼 찾지도 않겠지만)
전원 몰살을 향해 가는 전대 미문의 클라이막스는 필름 애호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성향을 고스란히 짊어다가 불길로 퍼붓는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총격씬을 잔뜩 기대했던 친구가 폭탄, 불길, 아가리(!) 중심으로 연결되는 액션에 실망해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런 반전(?)을 은근히 즐기는 게 쿠엔틴 타란티노고, 그에 대한 보상도 충실하게 해주는 게 쿠엔틴 타란티노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총격씬은 장고: 분노의 추격자로 넘치도록 보여줬고, 이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했으나 조연으로 이용된 브래드 피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조연으로 캐스팅되어 실질적 주연으로 활약했다. 이건 분명히 쿠엔틴 타란티노의 악동 기질이 발휘된 거라고 본다.
그건 그렇고 이 시절의 멜라니 로랑은 정말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지금은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의 시절의 스타일링을 한 멜라니 로랑이 특히 아름다웠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