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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스나이더의 열혈 팬덤의 정체, 까가 빠를 만든 결과

즈라더 2021. 6. 16. 12:00

 빠가 까를 만든다는 말을 많이 쓰지만, 실제로는 까가 빠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까'라는 헤이터는 원래부터 비호감을 가지고 있을 때에나 성립할 수 있지, 빠질을 역대급 쓰레기처럼 하는 사람이 있어도 '뭐야 저 X신은'하고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반대로 극렬한 까들을 보면 '왜 저렇게 까지?'하는 생각에 찾아보게 되면서 빠가 생겨나는 일이 잦다. 그래서 가끔 나보고 잭 스나이더의 빠질이 심해서 까를 만들고 있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웃긴다. 내가 왜 잭 스나이더의 빠가 되었느냐. 까가 너무 심해서다.


 새벽의 저주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다. 솔직히 지금도 이 영화에 내려지는 고평가가 이해가 잘 안 가지만, 그래도 좀비 영화 중에서 새벽의 저주 만한 게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이해는 한다. 그러나 300은 굉장히 혐오하는 영화였다.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즉, 시작부터 잭 스나이더 영화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게 나란 놈이다.


 그 다음 작품인 왓치맨은 꽤 재미있게 봤지만, 역시 매우 훌륭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감독판과 얼티밋컷이 있고, 그게 잭 스나이더의 의도와 가깝다는 건 꽤나 뒤늦게 알게 되었다. 써커 펀치는 괴상했다. 가볍게 즐기기 나쁘진 않아도 이걸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와패니즈와 밀덕 느낌이 진동하는 영화의 성향은 킬링타임을 향하는 게 보통인데, 영화는 무슨 예술 영화라도 되는 마냥 3중 구조로 구성되었고, 호흡도 느려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맨 오브 스틸이 개봉했다.


 맨 오브 스틸도 당시엔 개인적 취향에 별로 맞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느낌이 너무 짙어서였다. 칼엘의 우주선이 스몰빌에 떨어진 직후 화면 전환이나 시간대를 오고 가는 편집 방식은 전형적인 크리스토퍼 놀란 스타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잭 스나이더에 대한 헤이터들의 반응을 볼 기회(라기보다 그런 걸 볼 생각도 잘 안 하는 게 보통 아닌가.)가 없다가 맨 오브 스틸이라는 나름 메이저(!) 영화를 감독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반응을 보게 되었다. 과했다.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건 물론이고, 영화계에서 퇴출해야 하는 감독이라느니, 머리에 구멍을 내고 영화를 만드는 인간이라느니, 옆에 있었으면 총으로 쏴 죽였을 거라느니 하는 얘기가 마구 올라왔다. 나름 이름값있는 시네필이라는 작자들도 당시 불어닥치던 블로그 열풍 때문인지 자극적인 제목을 쓰느라고 온갖 험담을 다 꺼내 붙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잭 스나이더를 추천한 건 워너가 그에게 억지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찍게 한 것에 대한 복수라는 말도 올라왔다.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고 내가 느낀 감정을 말로 표현해보자면,


 "어, 저기 잠깐만요. 이렇게까지요?"

 

 

저런 배경에서 연기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 감이 안 온다..


 웃기는 건 정작 맨 오브 스틸이란 영화 자체는 평작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점이다. 맨 오브 스틸은 평작이지만, 잭 스나이더는 혐오한다. 그 평작을 연출한 감독이 잭 스나이더인데? 슈퍼맨 영화는 무조건 걸작이어야 하고, 잭 스나이더가 자신보다 뛰어난 감독이 연출을 맡는 걸 막기라도 했다는 걸까?


 이 시점에서 내가 알게 된 두 가지 사실. 맨 오브 스틸의 연출에 잭 스나이더를 추천한 사람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점과 잭 스나이더의 연출은 영상을 텍스트처럼 써먹는다는 점. 영상을 텍스트로 써먹는다는 점은 꽤나 쇼킹한 정보였는데, 난 잭 스나이더를 개성적 스타일의 영상을 만드는 감독 정도로 이해했지 그가 영상에 내러티브를 담아두는 스타일일 거라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터닝 포인트다. 잭 스나이더의 열성까들이 팬 한 사람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내가 뭘 놓친 걸까 싶어서, 저렇게들 잭 스나이더를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싶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훑기 시작했다. 잭 스나이더의 영화를 무조건 좋아한 적은 없어도 그냥 (기대치 혹은 예고편에 비해) 평작 수준이란 인상이 짙었기 때문에 저 무서운 반응은 그저 물음표만 띄웠다.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왓치맨 감독판이란 마스터피스를 만났다. 써커 펀치 확장판이 철학과 심리학을 마구 뭉쳐 만들어낸 실험작이라는 것도 확인했고, 맨 오브 스틸의 강강강강 액션 구성에도 익숙해졌다. 잭 스나이더가 영상을 텍스트로 쓴다는 얘기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까는 빠를 만들었고, 잭 스나이더의 팬덤이 마련되었다. 실제 잭 스나이더의 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대체로 그 시점이다. 맨 오브 스틸 개봉 이후 그에게 내려지는 끔찍한 비난을 보고 필모그래피를 다시 챙겨보다가 팬이되었다거나 혹은 배트맨 대 슈퍼맨에 대해 가해지는 무례한 비난들이 신기해서 영화를 봤다가 팬이 되었다는 얘기가 많다. 그렇게 빠가 된 사람들은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즉, 스나이더컷 제작까지 이뤄냈을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잭 스나이더는 걸작을 나열해낸 감독이 아니다. 팬이 있어봐야 얼마나 되었겠나. 그런 그에게 웬만한 아이돌 팬덤 못지 않은 열정의 팬덤을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까'다. 까가 빠를 만들고 또 만들어서 생겨난 것이 잭 스나이더의 팬덤인 셈이다.

 

뱀다리) '아미 오브 더 데드의 팬 모여봐요'라는 제목, '재미없게 본 사람은 뒤로 가기 부탁합니다'라는 내용의 글에까지 꾸역꾸역 출석해서 아미 오브 더 데드의 단점을 지적하는 댓글을 다는 게 잭 스나이더 까의 현실이다. 내가 그런 꼴을 보고 있기 때문에 굳이 싸우려 드는 사람에게 반박을 안 하게 됐다니까? 답정너한테 무슨 말이 통하겠느냐고. 까가 빠를 만들지. 앞으로 그의 빠는 더 많아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