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혼돈의 도시, 영화 베를린

즈라더 2020. 8. 19. 06:00

 꽤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본 <베를린>은 내 기억과 달랐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그런 모양이다. 영화의 편린만을 기억하고, 그 편린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그런 주제에 영화를 다 기억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분명히 <베를린>을 재미있게 봤고, 극장과 블루레이에 걸쳐 반복 감상을 거듭했음에도 오늘 보면서 '이런 내용이었나..'라고 중얼거렸다.


 <베를린>은 북한의 정권 교체 과정에 벌어진 정쟁이 (전 세계의 첩보 집단이 모조리 존재한다는) 베를린에서 카오스를 일으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류승완 감독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치열하게 대립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베를린에 직접 가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베를린에서 류승완 감독이 느낀 혼란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담겨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핸들을 꺾어버린다.

 


 힘에 부쳤던 건지 아니면 제작비의 부족이었던 건지 모르지만, <베를린>의 클라이막스는 홍콩 액션 영화로 귀결한다. 재미는 보장하지만, 내내 베를린 도심이란 설정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갑자기 갈대밭의 듀얼 씬으로 건너뛰는 건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격투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바위들은 기괴하기까지. 에필로그에 국제 관계가 일으킨 '혼란'이 되돌아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정체성이 뒤 바뀌어 뻔한 액션 영화가 될 뻔했으니까.


 참고로 <베를린>을 메가박스 이수에서 봤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엔 AT9 사운드로 명성이 자자했고, 화질도 아주 좋았던 영화관이다. 블루레이로도 당시 메가박스 이수에서 들었던 음향을 따라잡을 수 없는 터라 가끔 정말 그립다. 중반에 유리 천장이 무너지는 장면이나 클라이막스의 총격씬은 기가 막힌 사운드를 자랑했던 거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