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일상

2차 여요 전쟁 당시 고려군 병력과 흥화진

즈라더 2020. 7. 22. 18:00

 양규의 '괴력'이 돋보였던 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의 군사력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 개인적 오류를 정정하고 싶다는 점도 있고, 내가 이걸 정리했을 때가 무려 7년 전이니 그 이후 뭔가 다른 정보가 있으면 받고 싶기도 하다.

 

 일단 당시 강조는 광군 30만의 통제권을 얻고 방어전을 치른다. 여기서 고려 각지에 배치된 군사들과 광군 30만을 구분할 때 즉, 각지에 배치된 군사를 '현역군'으로, 광군 30만을 '예비군'으로 파악한다면, 고려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된다. 북계 동계에 배치된 둔전병이 12만 이상에 남도의 주현군 4만 이상, 중앙군 4만 이상. 그러니까 50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이는 옳지 않다. 그냥 고려의 군사력 전체를 광군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며, 시대적 상황이나 나라의 재정에 따라서 규모가 조금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했다는 게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2차 여요전쟁 당시 현종이 강조에게 맡겼다는 광군은 중앙군과 북계, 동계의 군사력을 더한 것 정도로 생각해야 옳겠다. 남도의 주현군은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제대로 동원할 수 없지 않았나한다. 따라서 강조가 데려간 병력은 15만 정도로 여겨진다.

 

 

 고려의 북계에서 대군이 지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던 모양이다.하나는 통주 방면이고 다른 하나는 귀주 방면이다. 따라서 강조는 양쪽 길에 걸친 여러 성에 병력을 분배해야 했을 거고, 그 중에 통주에 본인이 직접 주둔하면서 방어전을 준비했다. 통주를 제외하면 귀주에 굉장히 많은 병력이 주둔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귀주로 진출했던 거란군이 승리를 거뒀음에도 기록에서 사라지는 점과 이후 귀주 별장 김숙흥이 퇴각하던 거란군 1만을 참살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전쟁은 딱 나눠 떨어지지 않는다. 1만이 죽었으면 그 군대는 1만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을 게 분명하고, 특별한 전술을 사용한 게 아닌 이상 병장기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이 들어갔을 게 분명하므로 김숙흥이 이끌었던 귀주군은 아주 많았을 것이다.

 

 이후 강조는 통주 전투에서 방어전을 치르다가 패배하고, 고려군 3만이 죽는다. 가끔 30만이나 있던 고려군이 3만 죽었다고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느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는데, 강조가 통주에서 거느리고 있던 군사는 많아봐야 7~8만(여러 성과 길목에 배치했을 병력을 제외해야 한다)이었을 거고, 3만이 죽었으면 그와 비슷한 부상자가 있게 마련이다. 남쪽으로 도주했던 패잔병은 곽주성에서 재차 패배하여 전투력을 상실했는데, 당시 곽주에 포로로 잡혀있던 군민이 7천 명이나 되었던 걸 보아 사실상 강조가 이끌던 고려의 주력군은 절멸했다고 봐도 된다.

 

 고려는 곽주에서 패배한 이후 서경 인근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는데, 이 시점엔 동계에 있던 병력까지 끌어와서 전투를 벌였으므로 북계의 여러 성에 배치했던 병력을 제외하면 고려의 방어력이 완전히 상실된 꼴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흥화진에 있던 서북면도순검사 양규가 1700명의 병력으로 거란군 6000명이 지키고 있던 곽주를 공격해 거란군을 격멸하고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이 기적 같은 성과 덕분에 거란은 피난을 떠난 현종을 쫓지 않고 퇴각하게 된다.

 

본문과 관계없는 사진

 

 서북면도순검사인 양규가 흥화진에서 끌고 내려온 병력이 700명의 기병이란 점 때문에 흥화진에서 40만의 거란군과 맞섰던 병력이 700명이었다는 얘기부터 3000명이었다는 얘기까지 왔다갔다하며 퍼지고 있다. 일단 700명은 당연히 아니다. 성의 병력을 전부 끌고 나왔을 린 없으니까. 3000명이란 이야기는 그럴싸하긴 한데, 그 출처가 불명확해서 문제다. 난 예전에 흥화진에서 거란과 싸운 공로로 포상을 받은 병력이 1만이 넘었다는 기록을 봤다. 다만, 이 기록이 고려사인지 고려사절요인지 확실히 기억도 안 나고, 내 기억이 다른 기록과 섞여서 오류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문제다.

 

 그런 내 기억과 별개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강조나 양규가 바보가 아닌 이상 40만 대군과 정면으로 공성전을 벌일 흥화진에 겨우 몇천 명 정도만 배치했을 린 없다. 양규의 직위부터가 그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할 직위가 아니다.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맡고 있던 직책이며, 정확히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후 설치되는 서북면병마부사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위의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유사시에 서북쪽의 전선을 총괄할 수 있는 위치란 의미다. 그런 양규가 지휘하던 흥화진을 겨우 몇천 정도만 주둔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상대는 무려 40만이다. 수천 명의 병사론 3~4만의 병력도 막기 어려운데 40만을 상대로 7일이나 지킬 수 있다는 건 어림없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