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일상

축구공을 손으로 만들던 아이들

즈라더 2020. 7. 28. 00:00

 과거 유명 브랜드의 공인 축구공은 손으로 꿰메서 만들어졌다.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도 투입되었으며, 이는 당연히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과 직면한 스포츠 업체들은 기계로 축구공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덕분에 완벽한 구에 가깝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전의 이야기도 아니다. 나이키가 손으로 꿰메는 작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오르뎀 출시 이후라고 하니까 10년도 안 되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린 아이들마저 착취해가면서 만들어진 공이란 생각에 여러 리그의 공인구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선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한국에서도 불과 50년 전까지만해도 어린 아이들이 직업 전선에 투입되는 일은 빈번했다. '교육'의 혜택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던 시기, 어린 아이들 역시 일을 배워야 했고, 빨리 일을 배워내는 게 미덕이던 시기가 있었다. 선진국이었던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 근대엔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공업이나 농업을 가르치고 함께 일하며 돈을 벌었다. 이건 인권 이전에 생존의 문제다. 어쩌면 우리의 인권 운동이 축구공을 꿰메서 받은 돈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는 후진국, 개발도상국의 어린 아이들을 실직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뭐든지 본인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다. 우리 같이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가며 고등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아이들까지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었던 과거를 잊은 채 지금의 기준을 저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닐까? 우린 50년을 뛰어넘어 여기에 와있지만, 저들은 아직 50년 전에 머물러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서 생계 수단을 뺏은 거라면 이건 인권 운동이 아니라 인권 침해이자 범죄다. 

 


 겉만 본 것이다. 한참 사랑받고 공부하며 자라나야 하는 어린 아이들이 그러지 못 하고 글로벌 기업의 악덕한 관리자들에게 착취당하는데, 이를 그저 방관하는 부패한 후진국 정부들. 이는 몹시 합리적이고 당당한 진실처럼 보이지만, 공을 꿰메는 일이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받아들여졌을 누군가에겐 어처구니 없는 거짓일 수도 있다. 더러운 환경에서 오염에 노출되어가며 일한 거라면 그 환경을 개선해주면 그만이지 왜 일자리를 빼앗느냐며 눈물을 흘린 누군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전부 if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묻을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인권 자체가 그렇다. 인권은 if에서 비롯된다. 만약, 저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란 이상이다. if가 없다면 인권도 없다.


 오늘 다음 시즌에 사용될 공인구(사진)들을 봤다. 이젠 사람의 손으로 꿰메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공이 아니다. 완벽한 구체를 추구하고,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축구공의 미래에 사람의 손이 들어갈 곳은 많지 않다. 어쩌면 기계가 공업을 장악할 미래를 미리 본 느낌이다. 과연 공을 손으로 꿰메지 않아도 될 후진국, 개발도상국의 어린 아이들은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