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 루시, 차원의 끝을 보고자 한 뤽 베송

즈라더 2020. 7. 15. 13:10

 영화 <루시>는 차원에 대한 이야기다.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냈다'와 같은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학자들이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뤽 베송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펼쳐내는 영화란 의미다. 우리의 존재가 시간에서 비롯되었고, 시간은 연속적이지 않다는 개념. 즉, <루시>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철학, 물리학, 수학 측면에서 수도 없이 연구된 만큼, 닳고 닳은 소재다.


 과거와 미래는 이미 정해져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상위 차원에선 모든 게 고정된 것처럼 보이게 되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당연히 이에 대해 부정과 긍정을 반복하는 연구가 이어졌고, '수학적으로 완벽한 사이비 종교' 소리마저 듣는 초끈이론은 시공간 개념에 대해 궁금해하는 감독들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그래서 뤽 베송이 <루시>를 만든 것이다. 너무 알고 싶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루시>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마더>와 매우 흡사하다. 강단 있는 감독이 자기 식으로 의문을 풀어놓았는데, 그 의문의 대상이 <루시>는 '차원'이고 <마더>는 '종교'인 셈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와 엔딩에 걸쳐서 장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는 언뜻 난해해보이지만, 고정되어 있는 시간을 훑으며 태초를 확인한 루시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매우 심플하게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세포의 분화는 특정 유전자가 변종을 일으켜 지금 인간의 두뇌가 되었다는 과학적 사실과 연관되어 묘사되는데, 루시와 루시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 루시는 태초의 '루시'기도 하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루시기도 하다. 말한 바와 같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루시>의 엔딩을 보고 얼빵한 기분을 맛본 사람이 많은 이유는 기존의 수많은 시공간 관련 영화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끝난 것과 달리 아예 끝을 봤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든 <컨택트>든 <아키라>든 간에 모두 존재 자체를 확인시켜줄 뿐 주인공을 그 너머로 보내버리진 않았다. 기껏해봐야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정도가 비슷한 개념으로 넘어갔지만, 그것도 유사 4차원인 전뇌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루시>는 유니크하다. 


 <루시>는 그 끝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학적 오류를 저질렀다. 뇌의 활성화와 관련된 가쉽은 이미 과학자들에 의해 부정된 바 있고, 영화에서 루시에 의해 격하되는 수학은 적어도 3차원에 있는 우리에게 시공간을 계산할 유일한 방법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컨택트>의 '문자'처럼 극적인 왜곡일 뿐이다. 실제 <루시> 블루레이의 스페셜피처를 보면 뤽 베송 역시 과학적 오류 논란을 인지하고 있다.


 이제 이렇게 선을 넘어서 끝까지 가는 영화를 대규모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이 없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스튜디오가 허락을 안 한다. 뤽 베송이나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각기 흥행에 실패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대중은 이런 '미지수'의 단계로 아예 넘어갔으면서 그 미지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는 작품을 구시대적 발상으로 보는 듯하다. 사실,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다. <루시>와 같은 영화는 선을 넘으면서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감독 본인부터가 그 '미지수'가 뭔자 궁금해서 만든 영화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의문을 통째로 영화로 만들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