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 갈증, Kanako in Crazyworld 미친 세상의 카나코

즈라더 2019. 3. 15. 06:00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불량공주 모모코>, <고백> 등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보여온 감독이다. 그는, ‘미친 세상’을 충실히 표현하는 것에 몰두해있다. 정신착란을 일으킬 만큼 산만하거나(불량공주 모모코) 섬뜩할 만큼 완벽하게 정제된(고백) 연출로 등장인물을 끔찍한 상황에 몰아넣은 뒤 “당신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은 미쳤고 당신 역시 미쳤다. 아닌 척 위선 떨지 말아라.” 라며 윽박지른다. 영화 <갈증>은 그런 그의 시선이 매혹적으로 담겨있다.


  <고백>을 감상한 사람은 나카시마 테츠야가 얼마나 모호함을 사랑하는지 알 것이다. <고백>의 엔딩은 모든 게 ‘완성’될 수 있었던 순간에 감상자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기는 형식이었고, 그가 모호함으로 캐릭터를 완성시킨다는 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런 성향은 <갈증>에서 더 확실한데, 아키카주(야쿠쇼 코지 분)가 카나코(코마츠 나나 분)를 성폭행하는 원작의 설정을 목을 조르는 것으로 바꿔, 아키카주에게 모호함을 주입함과 동시에 성격을 바꿨다. 그는 원작과 다른 주제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호함을 이용한 것이다. 인간을 ‘알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고려할 때, 원작 속 이야기가 자신이 파악한 인간이란 존재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갈증>이 추구하는 건 ‘악마 카나코’의 화려한 살육처럼 뻔한 비주얼, 미스테리가 아니라 깨진 유리마냥 미쳐버린 세상이다. 이는 플래쉬백 기법을 남발하며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모호하게 몽타주 처리한 것에서 즉시 파악할 수 있는데, <갈증>에서 퍼즐을 푸는 듯한 쾌감을 느끼기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갈증>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엔 정당한 동기를 지니고 움직이는 이가 거의 없다. ‘카나코 월드’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동일시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설득력을 요구하지 말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 영화에서 추리의 쾌감을 느끼길 기대하는 건 옳지 않다. 깨진 유리를 원래대로 맞춘다 생각해보시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파편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할 터. 그 좌절이 <갈증> 속 추리와 몹시 닮았다. 이는 앞서 말한 모호함에 더해져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게 한 결정적 요인이다.



  깨지기 전 유리와 깨진 후의 유리가 같을 순 없다. 그걸 다시 짜 맞추려 한다면 미세하게 흩어진 파편마저 찾아 헤매는 ‘추격’이 필요하다. 그래서 <갈증>의 극단적 사건들은 추격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 다가가려 할수록 멀리 도망치는 카나코의 잔상이 아키카주의 미친 추격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좀비처럼 추격해서 깨진 조각들을 채워넣으니 아무 것도 없는 하얀 설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공허함 그 자체다.


  만화 <몬스터>를 읽어본 사람은 카나코와 요한을 겹쳐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주변 이들을 ‘이상한 나라의 카나코’에 가두어버린 존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이 그녀를 찬양한다. 그런 카나코가 사라짐과 동시에 ‘이상한 나라’가 함께 붕괴했다. 잔혹한 신체 훼손 장면을 동반한 살육 장면은 그 붕괴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붕괴의 여파는 경찰과 야쿠자에까지 미쳤다. <갈증>이 추리 요소를 지닐 수 없는 이유엔 이 카나코란 인물이 허상에 가깝다는 것도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압도적 존재를 숭배하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추리한다는 건 어불성설. 이는 신을 현세에 데려와 증명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갈증>을 통해 ‘세상은 원래 미쳐있었다.’라고 말한다. 카나코는 아버지의 폭행을 겪고 악마성에 눈을 뜬 게 아니라 원래부터 악마였다. 이미 아버지인 아키카주부터가 악마적 성향을 띠는 인물이었고, 불륜을 저질러놓고 당당한 어머니 키리코 역시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악마가 탄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분명히 (카나코의) 세상은 원래부터 미쳐있었다.


  다만, <갈증>이 원작의 설정까지 바꿔가며 추구한 모호함 덕에 묘한 슬픔이 남는다. 공허함의 설산에서 “내 손으로 죽여야 해”라고 중얼거린 아키카주의 태도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아버지로서 어떻게든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거라면, 아키카주의 ‘다시 시작하고 싶어’란 바람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 된다.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남성에게 가한 응징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해서고, 카나코에게 저지른 폭행 역시 사랑하는 딸에게서 악마성을 보았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이런 해석이라면 <갈증>의 원동력이 되는 핵심 소재는 부성애다. 가정 불화가 시작된 이유를 서술하지 않은 것도 이런 고민을 던져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모호함을 한쪽으로 정리하는 건 나카시마 테츠야의 의도에 반하는 해석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부성애’ 만큼은 믿어보고 싶어질 정도의 강력한 영화라 도리가 없다. 카나코를 죽이려 했던 손의 감촉이 카나코와의 마지막 기억이라며 떨던 아키카주의 모습에서 억지로 부성애를 찾아본다. 아니. ‘戀情연정’이어도 좋으니 따뜻한 무언가를 갈구한다. 그가 설산에서 ‘분노’라는 이름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모든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갈증은 계속된다. 인간의 갈증엔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