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연예인

상상도 못 했던 일뽕들의 한국 대중문화 비난

즈라더 2019. 3. 13. 06:00

 설마 제 입(손)에서 '일뽕'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타인이 보기엔 제가 바로 '일뽕'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키라>, <패트레이버>, <공각기동대>, <원령공주> 등으로 애니메이션 쪽에 관심이 있었고, 모닝구무스메를 시작으로 일본 걸그룹에 관심이 있었으며, 홍콩영화 붐이 끝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다가 발견한 게 쿠로사와 아키라, 키타노 타케시의 일본영화였죠. 히로스에 료코의 드라마를 시작으로 지금도 일본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 이쯤되면 일본 대중문화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전 분명히 타인에게 일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누가 제게 일뽕이라고 말하면 울컥할 것 같습니다. <프로듀스48>을 계기로 진짜 일뽕들을 봤거든요.


 <프로듀스48> 방송 내내 일뽕들은 온갖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만들고 한국인 연습생들을 비하했습니다. "연습생들이 저렇게 노래와 춤을 잘 할 리가 없고, 연습생들이 편곡에 참여했을 리 없으며, 연습생들이 안무를 만들었을 리 없는 데다 연습생들이 랩메이킹을 했을 리 없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자리잡았는지, 이 생각을 연예계에 관심이 없어서 모르던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고 있더군요. 이따금씩 디비디프라임에서 일뽕들의 정치질에 걸려 <프로듀스48>의 내용 전체를 조작이라 여기는 사람도 봅니다. 무슨 아이돌들이 저런 걸 다 할 수 있느냐면서요. 투표를 조작했다면 모를까, 수십 명에 달하는 연습생 개개인의 행동이나 능력 쪽을 조작이라 여기는 건 어이없는 일이잖아요. 심지어 그 조작의 목적이 일본인 연습생들을 떨구기 위한 거라니, 이 무슨 괴상망측한 망상이랍니까. <프로듀스48> 자체가 '합작'인 걸요. 아직도 위스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정신 차려야 하는 게, <프로듀스48> 한정해서 CJ와 가장 친한 거로 따지자면 일본의 AKS가 제일입니다. AKS는 친한 정도가 아니라 합작 파트너니까요.


 제가 한참 모닝구무스메와 AKB48, 노기자카46, 퍼퓸, 이걸스 등 일본 걸그룹을 깊게 파고 있을 때도, 이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당장 고개만 살짝 돌리면 날고 기는 케이팝 걸그룹들이 눈에 보이는데,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면 양심을 파묻은 꼴 아니겠습니까. 아니, 고개를 돌릴 것도 없이 실력으로 일본 연예계를 쌈싸먹던 보아가 코 앞에 있었는 걸요. 이게 근래에 와서 차이가 벌어진 게 아니라 아직 하로프로가 AKB48에게 대권(?)을 내주기 전인 시점, 그러니까 아직 소녀시대나 원더걸스로 대변하는 2세대 걸그룹 시대가 오기 전에도 이미 실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어요. 우리나라 연예계는 불법 다운로드의 범람으로 심하게 망가져있었고, (일본 식 표현으로)아티스트 지향이었던 지망생까지도 밀어넣어 그룹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차이가 안 나면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근래 아이즈원 덕분에 일뽕들이 한가득한 사이트도 잠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충격적인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일본 드라마를 찬양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두고 '요새 한국 드라마도 많이 좋아졌더라. 아직 영상미는 일본 드라마에 못 미치지만'이라고 하더군요. 


 "네?"


 대체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 거랍니까. 일본 드라마의 영상미가 한국 드라마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언제였는지 아득해요.


 레드 카메라 열풍이 몰아닥치고 <추노>를 레드 원으로 찍은 시점부터 우리나라 드라마 업계에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영화 촬영용 기기들을 드라마 판에 냅다 들고 오는 광경이 일상다반사가 되었어요. 드라마 전체를 DSLR로 찍는 실험도 감행했지요. 디지털 색보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덕에 영상미가 뛰어난 드라마로 인기를 누렸던 <태왕사신기>도 지금 보면 굉장히 촌스런 영상처럼 느껴질 만큼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는 크게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영상에 지나칠 정도로 공을 들이다보니까 '영상미에만 신경 쓰지 말고 작품에 집중 좀 해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 걸요. '쓸고퀄'이란 말이 한국 드라마에 그대로 적용되던 시기가 있었을 만큼, 한국 드라마의 영상은 좀 기형적으로 뛰어나요.


 반면, 일본 드라마의 영상은 갈라파고스화되어 2010년대 중반까지 발전이 거의 없었어요. 최근에 들어와서야 고급 촬영 기기의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반사전제작이란 유리한 환경을 이용해서 뛰어난 영상미를 TV에 뿌리기 시작한 겁니다. 일본 드라마의 영상 쪽이 얼마나 갈라파고스였냐면, 촬영기기의 퀄리티가 일본 쪽이 더 뛰어날 때도 잦게 있었음에도(원래 하드웨어는 일본이 훨씬 좋은 거 가져다가 씁니다) 그 기기를 제대로 써먹으려고 생각조차 안 했어요. 조명 관용도가 뛰어난 카메라를 써도 구형 카메라로 촬영하던 시절과 똑같은 조명, 똑같은 구도, 똑같은 보정을 하니 발전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블랙의 깊이가 뛰어난 레드 카메라로 촬영을 했는데, 기껏 완성된 블랙을 (항상 해왔던) 왜곡된 보정으로 청록색으로 만들질 않나, 필름의 옐로우 톤이 그대로 반영된 알렉사 카메라로 촬영했는데, 더 짙은 노란색 필터를 끼워버리질 않나(영상이 주황색이 되어버리는 마법).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비싼 기기를 쓰냔 말입니다. 이렇게 기기의 특성조차 못 살리는 아둔함이 사라진 지 얼마 안 됐어요. 그 사이 일본 드라마와 한국 드라마의 영상 격차는 어마어마하게 벌어졌고요.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만든 일본 드라마보다 편성 펑크가 나서 급하게 투입한 소규모 한국 드라마의 영상이 더 뛰어날 때마저 있는 걸요.


* 모든 한국 드라마의 영상이 뛰어나다는 거 아니고(예: 일일드라마), 2010년 초중반 일본 드라마 모두가 발전없는 영상이었다는 거 아닙니다. 전반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


 그러니까 일뽕들의 저런 생각은 딱 처음 일본 대중문화에 빠져들던 시기에 갇혀있는 겁니다. 일본 대중문화가 갈라파고스화되니까 똑같이 고인물이 된 거에요. 애초에 일본 드라마의 장점이 영상미가 아니라, 10화 안팎의 짧은 길이와 장르의 다양성이었단 걸 떠올려보면 정말 신기할 일입니다. 그러고보니 요새 한국도 케이블과 종편의 성장으로 장르가 굉장히 다양해졌군요. 다양성에서도 점차 격차가 좁혀지니 당황이라도 한 걸까요? 글쎄요. 당분간은 그런 걱정까지 안 해도 될 텐데. 한국 드라마가 일본 드라마 만큼의 다양성을 지니기엔 여전히 플랫폼의 한계가 있고, 방통위와 여가부라는 최종 빌런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터라.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 대중문화보다 크게 낫다고 말하면 그건 엉뚱한 거짓말이죠. 지금 당장 케이팝이 제이팝보다 좀 낫다고 해서 그게 취향 차이까지 깨버릴 수 있는 건 아니고, 한국 드라마는 아직도 장르물에 취약합니다. 애니메이션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 넘사벽 수준으로 뛰어나니까 일뽕들이 공격하고자 한다면 걸려드는 게 아주 많을 거에요. 문제는 명백하게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 대중문화보다 나은 부분까지 인정을 못 한 채 '그럴 리 없어'를 시전한다는 겁니다. 아니, 공격할 만한 것들을 내버려두고 왜 "일본 대중문화가 모든 측면에서 우월해야 한다"로 귀결하나요? 그러니까 일뽕이란 소리를 듣죠. 하는 말이 일본의 넷우익들과 다를 게 없는데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요.


 근 몇년 간 일본 대중문화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이트를 자주 가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얕게 파는 커뮤니티 사이트나 제가 직접 5CH 등을 뒤적거리는 게 보통이죠. 그쪽 사이트들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살다가 <프로듀스48>을 계기로 다시 찾아가보게 된 건데, 마치 일본 대중문화의 갈라파고스화를 쫓기라도 하듯 고여버린 모습에 많이 놀랐습니다. 일뽕 소리를 들으며 살다가 진짜 일뽕을 보고 나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느낌. 대체 왜들 그러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