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일상

LCD에서 중국에 패배한 한국, 한류도 화류에 밀리는 건 아닐까

즈라더 2023. 5. 15. 06:35

 한국이 사실상 LCD 시장의 치킨 게임에서 패배했다. 막대한 보조금과 인력 투자를 앞세운 중국의 TCL에 모든 걸 내주게 되었다. 삼성은 아예 회복이 불가능한 시장이라는 걸 인정이라도 하듯 TCL의 자회사인 CSOT의 주주가 되는 대신에 LCD 공장부터 특허까지 전부 팔아치웠다. 최근 삼성이 OLED 쪽에 갑자기 엄청난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제 LCD는 중국의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고급형 LCD를 제조하는 곳은 LG 하나뿐이 되었으며, LG 역시 언제 이 시장에서 빠져나갈지 모른다. 그리고 OLED 역시 BOE의 맹렬한 추격에 더해서 CSOT과 JOLED 관련 이슈 때문에 격차가 1~2년에 불과하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이 처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한국이 일본과의 치킨 게임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한국은 중국과의 치킨 게임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이 패배가 LCD 시장 하나로 그칠 것 같지도 않다. 대중문화도 그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중국의 부의 상징인 푸동지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서약함

 

 중국인들은 자신의 문화를 화류라고 부르며 이미 퀄리티에선 한류를 이겼다고 떠벌인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가 중국에 진출하지 않아서 그렇지, 중국에 진출했다면 한류보다 훨씬 크게 성공했을 거라 주장한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만 감상해도 넷플릭스 주간 순위 1위는 밥을 먹듯이 해낼 수 있다. 중국에 반감이 매우 크고 한류의 영향력이 장난이 아닌 대만에서도 가끔씩 (대만이 아닌) 중국 드라마가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끝까지 부정해도 여전히 중국 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한류 드라마의 힘을 잊어선 안 된다. 중국인들은 넷플릭스가 중국에 진출하면 중국 내 순위는 전부 중국 드라마가 차지할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올해 중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드라마는 중국이 자랑하는 그 화류 드라마가 아니라 <더 글로리>였다. 다만, 저들의 경고를 마냥 무시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페친 중에서 대중문화 방면의 인류학을 공부한 분이 계신다. 그분이 넌지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 연예인 사진을 올릴 때가 아니다."라고. 무슨 의미인지 묻자, 앞으로 화류가 더 성장하고 그게 한국에도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다면 극단주의 성향을 지닌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굴 사냥하고 다닐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지금 열심히 중국 연예인을 영업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조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해서 반박할 거리를 고민하다가 순간 최근에 중국 연예인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여기까지는 조선족의 한국 거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 OTT 기업들이 중국 드라마를 끝도 없이 사 오는 것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면 그렇지가 않다. OTT 기업들은 바보가 아니다. 수요가 없는데 서버를 낭비해 가며 스트리밍을 해줄 리가 없지 않나. 조선족들은 중국의 OTT가 한국에 진출해 있기 때문에 굳이 한국 OTT 기업에 돈을 내고서 중국 드라마를 감상하지 않는다.  중국의 OTT는 이미 전 세계에 발을 뻗고 있고, 광고 요금제 무료라는 획기적인 형태를 통해 뿌리를 내린다. 조선족들은 그들의 OTT를 공짜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한국 OTT에 돈을 내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분명히 한국에서 화류 팬덤은 유의미하게 커져가고 있다. 이미 화류의 영향력이 한국 사회 내부에 스며들고 있다.

 

중국판 런닝맨 촬영에 임하는 백록

 

 'Copy', 'Taste', 'blow up'. 중국 산업의 발전은 이와 같은 형태를 띤다. 모든 걸 카피해 버리고 인재를 빼앗아서 노하우를 익히며, 그것을 대중에 맛보도록 한 뒤에 시장을 확대해 치킨 게임으로 몰고 간다. 전 세계는 대다수의 산업에서 이 방식으로 중국에 자리를 빼앗겼다. 위 과정을 거치기 위해선 정부의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어야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국제법에 따라서 그게 제한되거나 애초에 정부에 그 정도의 돈이 없을 때가 잦다. 빼앗기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대중문화 역시도 위와 같은 형태를 그대로 재현한다. 중국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 예능의 스타일을 복사해 가거나 인력을 빼와서 노하우를 익히고, 심지어는 아예 완벽하게 똑같은 방송을 만들어버린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현재 중국 연예계는 단계를 밟아 blow up 상태다. 중국 연예계에 관심이 있고, 중국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만드는 만큼 화면의 때깔이 이미 우리나라의 것 못지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래봤자 중국은 안 된다. 검열이 있다.'라는 주장은 아직까진 유효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를 일이다. 왜냐, <나의 아저씨> 리메이크가 결정되었기 때문. 그냥 결정된 게 아니라 가장 중요했던 남자 주인공 역할에 조우정이라는, 중국 연예계에서 톱클라스에 해당하는 젊은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대만의 배우기 때문에 대만 팬들은 기대 반 슬픔 반으로 지켜보는 중) 굉장히 공을 들인다는 얘기다. 난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다. <나의 아저씨>를 감상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회의 외곽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과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는, 사회 비판을 은유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청춘적니>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시대를 은유하는 작품에 대해서 중국 광총(검열을 담당하는 기관이다)이 계속해서 허용해 주기 시작한다면 그 검열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검열로부터 해방된 중국이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벌써 걱정이지 않나.

 

 분명히 화류는 아직 한류에는 비할 수 없어도, 상당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도 변화를 꾸준히 추구하는 터라 예전처럼 모든 작품이 30부작, 40부작씩 되지 않는다. 10부작부터 20부작 정도로 제작되는 작품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화류와 다르게 우리나라는 어떤가. 지금 영화계와 드라마계는 자본의 씨가 말라서 완전히 박살 나고 있다. 박살 나고 있는 걸 대중문화 업계의 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인지조차 못하는 건지 헛발질만 계속 해댄다. 결국 업계의 모든 것이 넷플릭스에 몰려가고 있지만, 넷플릭스가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그들을 전부 받아줄 수는 없다. 넷플릭스 역시 자본은 한정적이다. 서두에 언급한 디스플레이 업계의 위기보다 훨씬 더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얘기다. 과연 한류는 화류의 도전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다.

 

 최근 중국 연예인 사진을 거의 올리지 않고 있는 건 이런 사정 때문이다. 나 혼자 대충 검색해서 중국 연예인 사진을 보고 예쁘다느니, 섹시하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면 그만이지, 굳이 남들도 같이 보자고 블로그에 올리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모두가 느껴야 하는 시대다. 정부가 대중문화에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을 게 분명하므로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 사소하게나마 이렇게. 앞으로 내 블로그에 중국 연예인 사진 자체가 포스팅이 되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