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앤트맨과 와스프> 블루레이를 감상한 주목적은 영화를 즐기려는 것보다 HDR10과 블루레이의 SDR을 비교하려고 했던 건데,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정줄 놓은 채 쭉 봐버렸다. 근래 실망스런 작품만 거듭 만들어내던 마블에서 이 정도 클라스의 작품이 어벤져스도 아닌 앤트맨 시리즈에서 나오다니. <앤트맨>이 취향에 안 맞았던 내가 그 속편에 킹왕짱을 외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튼 간에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앤트맨과 와스프>의 HDR 그레이딩에 의문을 품었던 건 블랙의 깊이가 심각하게 얕다는 것과 DCI-P3를 활용한 '보이지 않던 색까지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루레이의 SDR로 재차 감상하면서 그 의문은 더욱 명백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4K 블루레이의 HDR과 블루레이의 SDR은 블랙의 깊이 면에선 비슷하지만 자연스러움은 SDR이 한 수 위고(HDR을 하얗게 뜬 블랙으로 그레이딩해놨으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색농도 측면에선 SDR이 훨씬 낫다. 그렇다고 DCI-P3를 제대로 써서 보이지 않던 색이 보이느냐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물론, 잘 뒤져보면 없지야 않겠지만, 애초에 다채로운 색상을 거의 써먹지 않는 영상(화려한 것과 색을 많이 쓰는 건 분명히 다르다)의 마블 영화에서 그걸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HDR이 짙은 블랙과 짙은 색농도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DCI-P3의 넓은 색역과 로컬디밍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감마값을 손댄 것마냥 짙은 블랙과 색상이 나오도록 하는 동시에 SDR에선 볼 수 없었을 색으로 디테일을 추가하고, 로컬디밍 기술로 화면의 특정 파트에 빛을 뿌림으로써 '짙은 어둠과 색상임에도 보일 거 다 보이게 조정한다'는 말 그대로의 'High Dynamic Range'를 재현하는 셈인데, 디즈니는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밝은 구간의 빛을 조정해 시원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한 것 같다. 어두운 구간을 하얗게 뜬 블랙으로 대충 다 보이게 해놓고 밝은 구간의 퍼포먼스에만 집중한 것이다.
보통 이런 문제는 돌비비전에 집중하느라 소홀히 한 HDR10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정작 <앤트맨과 와스프>엔 돌비비전이 실리지 않았다. 돌비비전은 극장용 마스터에만 들어간 듯. 마블이 이제 4K 블루레이도 날로 먹으려 드는 건가 싶어 조금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