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은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의 각본가로 시네필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비록 두 영화 모두 각본이 상당히 각색되긴 했지만, 싸이코패스 살인마에 얽힌 어느 개인 혹은 집단의 다툼을 그린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악마를 보았다의 '울면서 웃는' 서글픈 엔딩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박훈정이 각본가로서가 아닌, 감독으로서 싸이코패스 살인마와 그에 얽혀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이들을 그려냈으니 바로 브이아이피다.
브이아이피는 저평가된 영화다. 개봉 당시엔 래디컬 페미니즘 열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는데, 살인의 대상이 된 여성을 지나치게 희롱한다는 이유로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수입사가 윈드리버의 겁탈 장면을 편집해서 개봉한 걸 칭찬하던 시기다. 끔찍한 검열의 기억.) 싸이코패스가 악랄한 짓을 하는 걸 보여줘서 불편함을 전달하는 게 의도인 장면을 보고선 불편하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이 괴상망측한 사태(!)에 박훈정 감독은 사과까지 해야 했다.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사과까지 하게 만든 그들에게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브이아이피에 대한 저평가는 일부 평론가가 겁을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훈정이 각본을 쓴 악마를 보았다를 언급하는 등, 엄청나게 잔인하다고 헛소리를 지껄여놨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잔혹한 순간의 대부분이 프레임 밖에서 벌어진다.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이런 영화는 금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를 중얼거리던 양반도 있었으니까 그러려니하겠는데, 그거에 낚여서 이 잔뜩 겁을 먹고 영화를 안 본 사람들도 참 엉뚱하다.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사회가 뒤틀리는 전작들처럼 브이아이피 역시 경찰, 국정원, CIA가 얽혀 기싸움에 돌입한다. 굉장히 시니컬하고 지저분한 내용이지만, 정작 촬영과 편집은 상당히 스타일리쉬한데, 이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주제에 권력까지 가지고 있고 잘생기긴 또 엄청 잘생긴 김광일에 딱 어울린다. 또한, 영화 전반에 걸친 '억울함'에 플러스 요인이 되기까지. 너저분한 현실의 주변과 달리 혼자서 고고하게 아름다움을 뽐내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다분히 의도적이다.
박훈정 감독은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의 엔딩이 마냥 행복하기 어려웠던 것에 대해 브이아이피로 답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기가 차는 꼴을 다 보고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 과정을 거쳐 브이아이피가 도달하는 곳은 다름 아닌 프롤로그.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겹쳐 연출한 박훈정 감독은 기어코 한 마디를 내뱉는다.
"죽어. 그냥 죽어 X발 새끼야."
브이아이피 블루레이가 출시되었던 시기에 이런저런 싸이코패스 살인마 영화가 참 많았다. 그 영화들이 온갖 장치를 덕지덕지 가져다 붙여서 살인마의 죽음 과정을 그럴싸하게 만들다보니 결말에 악당을 퇴치하더라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 종종 들었는데, 브이아이피의 엔딩을 보고 뒷골에 전류가 흘렀다. 그래 죽어야 할 놈은 죽어야지. 세상에 박재혁 같이 강하고 대담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적어도 박훈정 감독이 브이아이피로 하고 싶었던 말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이아이피 블루레이 화질엔 확고한 문제가 있다. 블랙레벨 조절 실패와 계조 밴딩. 하얗게 뜬 블랙으로 영상 전체를 망가트렸고, 그 와중에 계조 문제로 인해 등고선이 난립한다. KD 미디어(현 SM 라이프 스타일)가 빈번하게 저지르던 실수 중 하나가 브이아이피에 그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