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의 영화에 익숙하고 눈썰미 있는 분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맨 오브 스틸은 '테렌스 맬릭이 슈퍼맨을 만든다면?'이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대놓고 테렌스 맬릭의 연출을 쫓았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테렌스 맬릭의 영향력이 가장 많이 담긴 장면으로 꼬마 클락이 뛰노는 장면을 꼽곤하는데, 이 장면은 촬영 감독이 아니라 잭 스나이더 본인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핸드헬드로 찍은 장면입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왓치맨 때부터 있었습니다. 각종 상징과 단서를 영상 속에 펼쳐놓고 관객에게 '너희가 알아내라'라는 연출 성격은 누가 봐도 테렌스 맬릭 혹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향이었죠. 잭 스나이더는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두고 '내 의도대로 찍지 못 했더라도 이야기는 대체로 완벽하다'는 스탠스를 취합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완벽한(?) 영상 내러티브를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해하면서 인터뷰나 SNS로 하나둘씩 풀어놓는 겁니다. 이런 잭 스나이더의 스토리텔링 기법은 일반 대중에겐 그냥 어이가 없을 수 있지요. 아니, 블록버스터 혹은 오락성 넘치는 액션 영화를 찍어놓고 스토리텔링은 테렌스 맬릭 스타일이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랍니까. 마찬가지로 테렌스 맬릭의 열정적인 추종자라 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도 몇가지(사실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연출 기법을 따라할 지언정 오락 영화의 본분을 잊지는 않거든요. - 음, 테넷을 보아하니 앞으로는 또 모를 일이군요. -
보통 이 부분에서 잭 스나이더의 팬과 안티가 갈립니다. 이런 연출 기법에 반한 사람들은 잭 스나이더 만세를 외치면서 제발 잭 스나이더의 영화를 더 많이 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중얼거리고, 왜 우리가 액션 영화를 연구하고 분석해가면서 봐야 하느냐는 사람들은 그의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거지요. 사실, 어느 쪽이든 다 존중 받을 만한 의견이라 여기에 더 첨언하고 싶진 않습니다.
잭 스나이더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함께 테렌스 맬릭을 지지하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어떤 청원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잭 스나이더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잭 스나이더는 그런 유형의 문제에 자기의 이름을 쉽사리 올리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당시엔 그저 친한 동료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잭 스나이더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 양반이 아마 크리스토퍼 놀란보다 더 테렌스 맬릭의 추종자일 겁니다. 심지어 잭 스나이더는 자신의 의도대로 만드는데 성공한 영화로 가디언의 전설과 맨 오브 스틸을 꼽았어요. 그 맨 오브 스틸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스티스 리그는 굉장히 파격적 변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잭 스나이더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중에선 새벽의 저주, 300 다음으로 친절하거든요. 물론, 잭 스나이더의 연출 특성은 여전해서 클라이막스의 플래시 장면 등을 통해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더박스가 폭발하고 플래시가 시간을 되돌릴 때 어떤 대사로 상황을 전부 설명한다거나 굉장히 알기 쉽게 연출되었던가요? 아니죠. 플래시는 마음을 다잡는 대사를 중얼거릴 뿐이고, 룰을 깬다는 알쏭달쏭한 얘기를 할 뿐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감상자는 원소 단위로 분해되어버린 슈퍼맨의 시체(?)가 다시 뭉쳐져 생명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서야 플래시가 뭘 했는지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잭 스나이더의 스토리텔링을 두고 '이게 뭔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고 잭 스나이더는 반문합니다. '다 알려줬는데 왜 몰라!' 개인적으로 잭 스나이더가 이런 연출 성향을 완전히 버릴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의 영화는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릴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굳이 맞고 틀리고를 따진다면 잭 스나이더 쪽이 불리합니다. 그의 스토리텔링 기법은 분명히 가볍게 즐길 블록버스터를 찾는 사람에게는 난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