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인 불멸자들과 문명인들의 적절한 조화가 돋보이는 영화 <올드 가드>. 샤를리즈 테론이 그녀 영화 중에서 가장 멋진 비주얼로 나오는 영화기도 하다.
사방팔방에 카메라가 있는 정보화 시대인 데다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의 대학살이 일상다반사처럼 일어나는 현대에 기껏 몇명 되지도 않는 불멸자들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심지어 신체적 불멸이 아니라 '재생'하는 자들이다. <올드 가드>는 이 불멸자들을 대하는 문명인들의 올바른(!) 자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명인. 공동체를 이용해 편리를 추구하고 발전을 도모한다. 그러나 문명이 유지되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그 희생양이 왕이었다. 가뭄이 들고, 전쟁에서 패하고, 문명을 효율적으로 이끄는데 실패하면 왕은 희생양이 되어 반란을 맞이하거나 스스로 물러남으로써(보통 이 경우는 죽음을 의미할 때가 많다) 책임을 다한다. '신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옛날 사람들이 믿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자. 그건 문명의 대표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팻말이었다. 정말 신의 아들이라 생각했다면, 민란을 일으키지도, 역성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배움이 부족한 백성들이야 진짜로 믿었을 수 있지만 (물론, 그럼에도 힘들 땐 나랏님 욕하면서 버텼으니 같은 의미의 희생양이 되어준 셈이다) 적어도 지식인들, 특히 관료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믿은 게 아니라 '믿어준 것'에 해당한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집단적 최면이다. '너 때문이다'라고 말할 대상이 생기면 그게 합리적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가 납득해준다.
그럼 그렇게 희생양을 만든다는 '올바른 방식'으로 유지해온 문명인들이 불멸의 존재가 곁에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면 어떨까? <올드 가드>는 그 사례를 전달하는데 상영시간 대부분을 소비한다. 영원하기에 그 무엇보다 훌륭한 희생양. 적어도 작품 안에서 불멸이란 희생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저주와 동일한 단어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불멸자들 모두가 '왜 우리에게 이런 저주가 내려졌는가'를 두고 고뇌하고 분노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의 아들을 만들어 희생양을 만들 필요도 없이 진짜 신의 축복, 혹은 저주를 받은 이들인 것이다. 액받이 무녀로는 이보다 더 좋은 대상이 없다. 따라서 빨리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어느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영원히 고통받는 희생양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언제나 흔적을 지워야 하는데, 그보다 더 외롭고 두려운 삶이 어디있겠는가. 묶인 채 바다 밑바닥에서 끝없이 익사하는 두려움은 마냥 넘기기엔 너무 무겁다.
<올드 가드>는 이러한 '올드 가드'들의 두려움과 삶을 서술하는데 주력하므로 액션이나 음모 같은 것에 그다지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샤를리즈 테론의 영화치곤 분량이나 퀄리티가 높은 편이 아닌 데다 굉장히 허술해서 조금 엉뚱하다 싶을 지경으로, 시작부터 대놓고 반전 떡밥을 대량으로 흘려대니 속아주는 게 민망하다. 그러나 다소 스테레오 타입일 지라도 문명의 발전 방식이나 삶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영화다. 부디 속편에서는 액션까지 잡아내는 멋진 작품이 되길 빈다. 서둘려야 할 거다. 샤를리즈 테론이 언제까지나 저렇게 멋질 순 없을 테니까. 조만간 40대 후반이 되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