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필름이 최고라면서 주로 필름을 찾던 영화계가 디지털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2008년 레드 원 카메라가 나왔을 때고, 얼마 안 있어서 필름과 가장 흡사한 영상을 뽑아준다는 아리 알렉사 카메라가 등장하며 디지털 촬영 중흥기를 이끌었다. 한국에서 레드 원 카메라를 처음 사용한 영화가 2009년의 국가대표. 2010년에는 드라마 추노가 레드 원 카메라로 찍어서 시네마 디지털 기기가 대중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럼 현재는 어떨까?
헐리우드나 유럽의 영화계에선 2021년인 지금도 필름을 고집하는 감독들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필름 영화를 고집하는 감독들과 코닥 측에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나 잭 스나이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이 필름 애호가. 그러나 한국은 현재 필름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다. 2013년부터 2014년 사이에 필름 자막 업체, 장편영화를 현상할 수 있는 현상소 등 필름 관련 업체들이 모조리 사업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촬영이 본격화된 게 2010년이라고 치면 딱 3년 만에 100% 디지털로 전환이 된 셈이다. 이는 필름 촬영뿐 아니라 필름 상영도 마찬가지라서 한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디지털 상영만 하고 있다. 필름의 장대한 역사를 생각해볼 때 3년 만에 완전 전환은 충격, 파격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게 말이 되는 속도인가?
최근 들어서 한국의 엄청난 변화 속도에 감탄하며 한국을 쫓아야 한다는 외국 언론이 많이 보인다만, 모든 부분에서 한국처럼 빨리 변하는 건 좋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발전'이라는 전제가 반드시 있어야 '변화'는 긍정의 포지션에 설 수 있다. 한국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만든 2014년의 디지털 전환은 단순히 영상의 해상력 측면만 봤을 땐 발전이 아닌 퇴보에 가까웠다. 레드 원 이후 4K 카메라가 인기를 누리지 못했고(강렬했던 만큼이나 오류도 참 많았던 게 디지털이다.) 아리는 알렉사의 2.8K 혹은 3.4K 정도 해상력에 만족한 채 거의 7년 동안 폭삭 고여서 썩어갔다. 35mm 필름을 최대치로 긁어냈을 때 나오는 해상도가 5K라는 걸 생각하면 '화질' 측면에선 사실상 퇴보라고 봐도 좋다. 그저 제작비를 비롯해 '효율성'에 기반한 강제 전환이었던 것이다.
물론, 2021년 지금의 디지털 촬영은 퇴보가 아닌 발전이다. 필름 애호가였던 잭 스나이더가 8K 카메라인 레드 몬스트로를 맛보곤 만세를 외친 것처럼 이제 필름은 70mm 혹은 아이맥스 필름이 아닌 이상 화질 면에서도 디지털을 이길 수 없다. 35mm를 최대한 긁으면 5K까지 나온다고 말은 해도, 실제 결과물을 보면 최신 4K 디지털 촬영 기기보다 부족한 해상력이라는 게 드러나곤 한다. 해상력뿐 아니라 센서, 감도, 조명 관용도, 후보정의 용이함, 기기의 크기, 촬영 결과물의 보관 등을 고려하면 감독들이 필름을 내던져버리는 것도 이해할 법하다.
감도, 색온도 등 설정에 맞춰서 정해져있는 필름을 따로 구매해 사용해야 했고, 덕분에 심각한 제작비 낭비를 겪어야 했던 필름을 손절한 건 한국처럼 제작비에 허덕이는 나라의 영화계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3년 만에 필름으로 촬영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은 한국인 특유의 스피드가 얼마나 매서운지 알려주는 사례라 하겠다.
뱀다리) 의외로 철저하게 완벽주의로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2000년대부터 디지털 촬영에 몰입해있었다. 필름은 촬영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는지, 후보정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촬영이 다 끝났는데 마음에 드는 영상이 아니라면서 재촬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필름을 현장에서 뚝딱뚝딱 잘라버리고 미세한 화학적 색보정보단 필터를 끼워버리는 무자비한 스타일이 아니라면, 감독에게 디지털 촬영은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아이템이다. 제임스 카메론이나 데이빗 핀처 감독이 2000년대에 4K도 아닌 HD카메라로 영화를 찍어버린 이유가 바로 촬영 단계부터 영상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스탠리 큐브릭 감독도 살아계셨다면 바로 디지털로 넘어갔을 거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