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한국 최초의 SF라는 말은 틀렸다. 한국도 SF는 꽤 있어.) 타이틀을 들고 화려하게 공개된 승리호는 엄밀히 말해 '최초'니 하는 수식어와 별개로 가볍게 즐기기 적합한 영화임에 틀림이 없다. 스케일이 대단히 크다고 할 순 없지만, 나름대로 구색은 갖췄고, 우주 시퀀스의 널뛰기 편집으로 스릴이 감소하는 문제는 'K스타일' 카메라 구도와 핸드헬드로 적당히 덮었다. 전 세계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를 멀쩡하게 제작해내는 나라가 거의 없는 상황이니 이 정도면 나름 말끔하게 내놓은 셈이다. 솔직히 200억으로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 지경. 한국도 이젠 200억으론 승리호 정도 규모의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아마 VFX나 캐스팅 관련해서 여러 비용 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호는 분명히 가볍게 즐길 만한 영화 이상이 될 수 없다. 승리호의 공개 전후로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쓸모 없는 논쟁이 대체로 이 부분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로 귀결된 걸 보면 묘하게 '국뽕'이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비판 없이 지금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인기는 있을 수 없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승리호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필시 지녀야 하는 '공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부족하다. 현재 있는 공간과 과거에 있었던 공간의 구분이 명확해야 하는데, 이를 간과하고 적당하게 '여기는 어디다'라는 식의 대사만으로 끝낸다. 물론, 기껏 해봐야 지구 궤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므로 공간과 공간의 거리는 길어봐야 5시간 안일 것이다. (현재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정거장도 90분에 한 번씩 지구를 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공간과 공간의 개념은 지상의 일반적인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 승리호 속 대사 말마따나 우주에는 위아래가 없다. 감상자가 등장인물이 속한 공간을 특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묘사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진다는 얘기다. 승리호는 영화 전반에 걸쳐서 이 문제를 겪고 있다.
또한, 승리호는 신선도가 다소 떨어지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엘리시움을 아예 그대로 가져다 써먹었다. 선원이 처한 금전적 궁함이나 선체에 대한 묘사, 험악한 과거를 지닌 인간관계 등은 카우보이 비밥의 영향을 막대하게 받았으며, 클라이막스의 협력전은 누가 봐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의 영향을 받았다. 즉, 엘리시움으로 시작해 카우보이 비밥을 거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마무리되는 영화라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레퍼런스로 써먹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기엔 엘리시움은 실패한 작품이라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재패니메이션인 카우보이 비밥은 일본 밖에선 언제나 서브컬처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멸망의 기로에 선 지구의 모습은 스쳐 지나가는 컷에서도 블레이드 러너를 떠오르게 한다.
그럼 이 기시감 가득한 평작을 스페이스 오페라에 익숙한 외국에서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떠올린 건 한국인의 스타일이 SF와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 싶을 텐데, 난 인류멸망보고서부터 인랑이나 설국열차처럼 SF에 발을 반쯤 걸친 작품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짙지 않은 쌍꺼풀, 비교적 큰 키, 한국 연예인 특유의 깡마른 몸매, 찢어진 눈, 각진 턱, 비교적 하얀 피부 등이 SF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왔다. 한국인을 다소 차가워보이게 하는 요소들, 그리고 서구권이나 히스패닉으로부턴 인종차별의 주제가 되는 요소들이 SF에 잘 어울린다는 게 어이없지만, 어쨌든 진짜로 그렇다. 당장에 김수현과 같은 무쌍 커플의 한국형 미남이 도도함 뽐내며 SF에 출연한다고 생각해보시라.
다음으로 떠올린 건 지금 전세계가 스페이스 오페라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이다. 개봉 준비를 마친 SF 영화들은 코로나19 때문에 죄다 연기. 심지어 그 가운데엔 스페이스 오페라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틈새를 승리호가 잘 파고들었던 것이다. 비록 넷플릭스에 팔리는 바람에 수익을 크게 남기진 못 했지만, 코로나19 없이 개봉했어도 난 이 영화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 오히려 호재라고 본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무덤이다.
국뽕 유튜버들이 퍼나르는 외국의 승리호에 대한 과장된 반응을 배제하고서도, 승리호는 꽤 괜찮은 반응을 얻는 게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이 스페이스 오페라까지 성공시킨 것에 대한 충격이 여러 방향에서 전달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이다. 만약,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세계적으로 성공했다는 반응 자체가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세월아 네월아 시간 걸려서 외국까지 개봉하고 나면 이미 영화에 대한 화제성이 지구 궤도를 벗어나 우주 유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승리호는 HDR을 지원한다. 이게 원래 처음부터 HDR을 생각해서 제작된 건지, 아니면 유랑지구처럼 넷플릭스에 들어오면서 HDR을 추가한 건지는 모르겠다. 큰 기대는 하지 말자. 우주의 짙은 블랙과 로컬 디밍 라이트닝의 대비를 느끼기 어렵게 그레이딩 되었다. 광색역은 어떨지 몰라도 눈뽕 맞기 좋은 수준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