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바꿨다. 기존 그의 지나치게 설명에 집착하는 스토리텔링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건 픽션입니다'라고 인식시키는 수준에 도달해있었고, 극의 몰입에 다소 방해가 되는 단점이었다. 거장이라 불리기 위해서 가야 하는 마지막 단계가 필요했는데, <덩케르크>로 그걸 해낸 것이다. 대사가 아닌 영상으로, 가타부타 할 것 없이 관객을 영화의 세상 안에 집어던지는 스토리텔링의 '마지막 단계'에 분명히 도달한게 <덩케르크>다. 이는 마이클 만 감독처럼 극단적인 수준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을 만큼,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은 모두 깨달아 익히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대사가 아닌 영상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하는 연출이 설명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시간 여행'과 관계된다면 어떨까? <테넷>이 바로 그런 영화다.
운명을 믿는가? 운명은 끔찍하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의미니까. 그런데 <테넷>의 대사처럼 운명이 '리얼리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물리학자들 외엔 잘 모르는 듯하다. 시간은 모조리 정해져있고, 상위 차원에서 우리 차원의 우주를 보면 탄생부터 멸망까지 전부 볼 수 있다는 이론. 그러니까 이미 '나'라는 존재의 탄생과 죽음이 모조리 정해져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책의 1페이지를 읽은 뒤 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정되어있다는 충격적인 물리학 이론이다.
이 경악스러운 이론을 과연 대중문화 창작자들이 내버려뒀을까? 그럴리가. 정말 끝도 없이 써먹었다. 당장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만 하더라도 <인터스텔라>로 시공간의 왜곡을 다루고 테서렉트로 초끈이론을 건드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쿠퍼의 대사를 통해 웜홀부터 블랙홀, 테서렉트까지 모두 미래의 인류가 보낸 것이란 얘기를 한다. 모순이다. 쿠퍼가 미션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미래 인류는 없었을 것이고, 미래 인류가 웜홀이나 테서렉트를 마련해줄 수도 없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고정되어있어야 한다. <테넷>처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에이미 애덤스가 주연을 맡은 <컨택트>는 이와 같은 리얼리티를 '언어'를 통해 그려낸다. 결과적으로 <컨택트> 역시 <인터스텔라>의 결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컨택트>의 주인공은 미래의 자신이 얻은 힌트로 현재의 치명적인 위기를 모면한다. 뤽 베송은 <루시>로 대놓고 의자에 앉아 시간의 책장을 펼쳐보는 주인공을 그려놨다. 그러니까 이런 설정 자체는 보기 어려운게 아니다. 워낙에 창작욕을 자극하는 물리학 이론이기 때문에 만화, 드라마, 영화 어느 장르 가리지 않고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전면에 내세워서 '운명'이라 칭하진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내용이 사실상 '운명'을 이야기함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이 고정되어 있는 시간을 깨고 과거를 바꿔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 미래의 누군가가 어떻게 그런 물리학을 거스르는 장치를 개발했는지 모르지만, 그게 개발되었고 그걸 이용해서 세계의 멸망을 추구한다. 대체 왜? 패러독스나 다중우주 문제는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지? 라는 생각은 접어두자. 그건 영화 <테넷>에 나오지 않으니까.
미쳐버릴 정도로 어려운 영화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테넷>에서 쾌감을 느끼려면 디테일을 완벽하게 캐치해내는 어려운 작업을 거쳐야 한다. 사전 지식이 아주 충분한 상태에서 봐야 <테넷>의 역행 미션과 순행 미션의 교차편집을 이해할 수 있고, 엄청난 집중력을 가져야 클라이막스의 장대한 액션씬이 짜맞춰질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로 영상 내러티브 중심의 스토리텔링에 한 발 다가갔다. <테넷>은 <덩케르크> 만큼은 아니어도 영상 내러티브에 굉장히 집중한 영화다. 즉, <테넷>은 끔찍할 정도로 혼란스런 세상에 관객을 집어던져놓고 디테일을 하나하나 짚어주지 않는다. 한 번 봐서 <테넷>을 전부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사람에게 인간의 한계를 넘은 동체시력과 천재적 암산 능력까지 지닌 인물이라 말해주고 싶다.
엄밀히 말해 <테넷>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실수다. 무모해도 너무 무모했다. 영화 속 대사 마냥 디테일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면 액션이라도 멋져야하지만, <테넷>의 액션은 장대한 규모와 아이맥스 촬영이라는 압도적 영상을 무기로 삼았음에도 당혹스러울 만큼 심심하다. 순행과 역행의 싸움에서 '타격의 합'을 캐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또한, 주인공을 맡은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이런 유형의 첩보물을 맡기엔 지나치게 왜소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테넷>은 보는 맛이 있다.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가 항상 그런 것처럼 짜맞춰가는 재미는 물론이고, 순행과 역행의 합도 반복해서 감상할수록 눈에 잘 들어온다. 무엇보다 <테넷>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가 모두 그런 것처럼 로맨틱하다. 두 주인공이 엔딩에 이르러 나누는 대화는 넉살 좋은 로버트 패틴슨의 웃음 만큼이나 멋지고 서글프다. 이런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는 영상 내러티브 중심으로 스토리텔링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다.
이하 스크린샷은 <테넷> 한국판 블루레이의 원본 사이즈 캡쳐. 블루레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화질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장면을 아이맥스로 촬영한 데다 아이맥스가 아닌 장면도 65mm 필름을 동원해 찍었기 때문이다. 그 경이에 가까운 화질은 직접 보지 않고선 감이 안 올 터. 블루레이 화질의 끝판왕을 보고 싶다면 <테넷> 블루레이를 보면 된다. 반면, 극장에서도 지적되었던 붕 뜬 사운드는 블루레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믹싱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는 모양. 가끔 효과음과 테마곡이 뒤섞여서 분간이 안 가는 일이 빈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