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대중문화의 '레퍼런스'가 된 <애너미 앳 더 게이트>. 이후 수도 없이 많은 2차 세계대전 게임, 영화, 드라마 등에서 오마쥬되었으며, 특히 스나이퍼를 다루는 작품이면 <애너미 앳 더 게이트>를 참고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정도로 매력적인 영화지만, 뜻밖에도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의 두 작품과는 상당히 궤를 달리한다. 조금 과감하게 말하자면 훨씬 올드하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은 전쟁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작품이 여럿 나온 시기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현대전은 <블랙 호크 다운>으로 총격씬의 기술이 완성되었다. 전쟁의 한복판에 밀어넣고 서라운드 채널을 각기 다른 화기로 매워버리는 퍼포먼스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신기술'에 해당했다. 그저 모노 사운드로 덮어버리던 과거의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 발전을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선 거의 느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의 스나이퍼에 대해서 꽤 현실감 있게 다루었다고 해서 이 영화의 총격씬이 훌륭할 거란 생각은 버리자. '개인'이 중심인 스나이퍼를 다룬 만큼이나 영화는 상당히 격렬하게 치정을 그리는 편이며, 전쟁의 냉혹함을 전달하는 방식도 다분히 감정적이다. 상당히 담담하게 넘어가는 스필버그표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선홍빛을 드러내는 핏물 특수효과처럼 연극적인 요소가 강렬한 편이다. 영화 속 대사와, 터닝포인트의 과격함만 보자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단순히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말한 바와 같이 대단히 올드한 영화의 스타일은 디비디와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 '소모'하기 시작하던 대중에게 대단히 지루한 영화로 다가갔을 게 분명하다. 반면, 이런 스타일의 고전을 즐기던 사람들에겐 매우 익숙할 것이며,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다. 취향에 따라 걸작일 수도, 평작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속이 편한 영화는 아니다. 당장에 출연진만 보더라도 속이 편한 영화에 출연하는 이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전적 극전개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이하 스크린샷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 한국판 블루레이의 원본 사이즈 캡쳐. 영상 화질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리마스터링을 거치지 않은 HD 소스를 그대로 활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수준. 큰 기대는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