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감독의 패기와 한계가 고스란히 노출된 전쟁영화 <고지전>. 건너뛰는 요소가 지나치게 많고 편집이 난잡하다는 점 등 다양한 단점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연극적인 연출과 대사다. 조금 더 정확하게, 작위적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릴 법한 <고지전>의 스토리텔링은 상당히 큰 장애물이다.
그러나 <고지전>의 '모순'엔 그런 신인 감독의 한계를 깨버릴 힘이 있다. 년단위로 교착되어 양군의 시체로 단층을 만들어 쌓은 고지전은 기껏 해봐야 몇 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위해 수십만 명의 인력을 갈아 넣은 전대미문의 전투였다. 단순히 비슷한 자리에서 참호전만 몇 개월해도 적아 구분이 안 된다고 하는 마당에 년 단위로 그만큼 사람을 갈아 넣었으면 적아가 아닌 '(서로를 죽여야 하는)동료'로 인식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고지전>은 이런 과정을 꽤나 효과적으로 살린 편에 속한다.
1차 세계대전은 2차 세계대전이 파쇼즘이라는 명백한 '악당'이 존재했던 것과 달리 그저 유럽 열강들 사이의 힘겨루기에 불과했다. 자연스럽게 어설프게 자리 잡은 내셔널리즘이 희미해져 가며 병사들 사이의 동기가 사라졌고, 결국 오늘 서로 쏴 죽이고 다음 날엔 참호 위로 올라와 적군과 축구를 즐기는 모순이 펼쳐졌는데(이를 크리스마스 정전이라 부른다. 단발성 정전이었지만 국지적으로는 뜻밖에 빈번한 일이었다던가.), 같은 유럽이라곤해도 종족과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 굉장히 놀라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국전쟁처럼 사촌 지간에도 총을 겨눠야 했던 남한군과 북한군이 비슷한 모순을 겪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고지전>은 그 형태를 효과적으로 포착했다. 방금까지 욕설과 저주를 퍼붓던 대상, 동료를 난사해 죽인 적군과 히죽거리는 광경은 파격적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모순과 모호함을 더해 풍부한 감성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될 뻔한 클라이막스에 펼쳐지는 모순의 감정 파노라마는 모순과 모호함이 얼마나 강력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주는 듯하다. 머리로는 '친구인데..'라 생각하면서 몸은 자연스럽게 공격하는 연기를 배우들이 잘 표현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한편, <고지전>은 전쟁 영화임에도 과감하게 레드 원 카메라를 사용했고, 레드 카메라 본연의 질감과 조명 관용도를 그대로 활용했다. 덕분에 전쟁 영화 중에선 드물게 쨍하고 화창한 영상을 자랑한다. 전쟁 영화들이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거친 질감이 싫은 사람에겐 꽤 반가울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