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걸그룹/블랙핑크

걸크러쉬 그룹의 뒤통수를 때리는 블랙핑크 Lovesick Girls

즈라더 2020. 10. 2. 16:59

 걸크러쉬란 사람에 따라서 해석 방법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걸'을 부순다 즉, 여성 팬들의 마음을 부수는 스타일을 말하는 걸 수도 있고, '걸'을 여성으로 치환해서 여성스러움을 부숨으로써 여성성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스타일을 말하는 걸 수도 있다. 물론, 본래 의미는 전자에 가깝지만, 한국에선 언젠가부터 후자를 걸크러쉬라 부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여성성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놓고 노래가 컨셉에 매몰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방식의 걸크러쉬가 국내에선 안 먹혀도 외국에선 먹힌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그럼 현재 걸크러쉬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블랙핑크는 어느 쪽 걸크러쉬일까? 전자다. 멋지고 힙한 스타일링과 노래로 여성들의 마음을 부수는 걸크러쉬. 후렴구가 없는 스타일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유행시키고 제니의 솔로곡이나 <Kill This Love>로 마치 여성성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블랙핑크는 그런 것에 노래를 매몰시키는 그룹이 아니다. 블랙핑크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 노래거나 팬송이거나 대중을 저격하는 노래다. 분명히 올여름에 공개되어 3세대 걸그룹의 압도적인 원탑으로 자리 잡게끔 한 <HYLT>은 분명히 사랑 노래와 거리가 있지만, 이 노래는 트루킹과 YG의 죄를 블랙핑크에게 전가한 안티들에게 기꺼이 바치는 빅엿에 가까웠다. 

 

 이번 <LoveSick Girls>는 <마지막처럼> 이후 오랜만에 완전한 사랑이야기. 블랙핑크가 긴 공백기를 가지고 정규 앨범을 공개하기까지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던 걸크러쉬 걸그룹들의 뒤통수를 아주 강하게 때리는 노래다. 웬만해서 다시 등장할 것 같지 않던 걸크러쉬 스타일의 사랑이야기. 이 시점에서 한 번 되새겨보자.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걸크러쉬 걸그룹들이 블랙핑크의 영향을 받은 건지를. 당연히 아니다. 스타일링 측면에선 있지가 대놓고 블랙핑크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나섰지만(너무 과하게 자처해서 문제다), 노래 자체는 박진영이 미쓰에이에게 시도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고, 그 외 걸그룹들이 추구하는 바는 블랙핑크보단 소녀시대에 훨씬 가깝다. 

 

 

 <Mr. Mr.>로 대변되는 소녀시대의 걸크러쉬 추구는 일본 진출을 전후로 극한에 도달했었다. 그리고 지금 걸크러쉬 걸그룹들의 스타일링이나 노래들은 당시의 소녀시대를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치 새로운 세상을 연 것처럼 보이던 '걸크러쉬 흐름'은 결국 돌고 돌아 6년이 넘은 소녀시대의 스타일로 안착한 것이다. 당시와 지금의 차이라면 소녀시대가 '이게 무슨 걸그룹 노래냐'라며 엄청나게 비판받고 소녀시대 이름값의 우격다짐으로 성공한 것과 달리 진짜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잘 생각해보면 후렴구가 없는 걸크러쉬 타입의 노래도 <Catch Me If You Can>으로 소녀시대가 이미 시도한 바 있다. 비록 제시카 탈퇴 덕분에 제대로 활동도 못 한 채 묻혀버렸지만.

 

 즉, 지금의 걸크러쉬 열풍은 이미 낡고 낡은 과거의 소녀시대 컨셉에 페미니즘을 뒤섞은 것에 불과하다. 블랙핑크의 초대박 성공은 당연히 그런 것에서 온 게 아니며, <Lovesick Girls>는 그걸 증명하는 노래인 셈이다. 거나하게 뒤통수를 때렸다. 마치 걸그룹들에게 잘하던 거나 잘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 지금 걸크러쉬 그룹 중에서 소녀시대를 제대로 벤치마킹한 그룹조차도 이달소 정도 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블랙핑크의 전대미문의 압도적인 성적과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왜곡된 걸크러쉬 열풍은 사라지지 않을 예정이다. 코로나19로 행사를 돌 수 없는 상황이라 해외 판매량에 의지해야 하는 중소 기획사에게 해외에서 더 잘 먹힐 걸크러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게다가 최근 (여자)아이들이 메가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덕에 더욱 걸크러쉬에 매진할 것으로 여겨진다. 정작 (여자)아이들 역시 여성성을 배제하는 걸크러쉬가 아닌, 여성들의 마음을 부수는 걸크러쉬라는 건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