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비밀의 숲 적아 구분이 불분명한 어느 살인사건

즈라더 2019. 1. 22. 15:36

 안에서 난리를 쳐도 살짝 일렁일 뿐 물의 움직임에 지속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 아주 잔잔하고 단단한 물표면. 이대로 두면 안에 든 물이 고여서 썩는 건 따놓은 당상. <비밀의 숲>의 (그리고 우리의) 세상이 그렇다. 어느 날, 살인자가 그 물표면에 돌을 던졌다. 놀랍게도 풍덩, 요란하게도 요동친다. 그러나 그마저도 한순간. 마치 없었다는 듯 다시 잠잠해진다. 참을 수 없었던 살인자는 다시 한 번 물에 돌을 던진다. 제발 물 안의 누군가가 반응해주길 바라면서. 던진 돌이 물표면을 강타한 뒤 바닥에 닿기 직전. 기대했던 누군가가 돌에 손을 뻗었다. 꽉 움켜쥐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며 물표면을 뚫고 고개를 내밀었다.


 <비밀의 숲>은 감상자를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놓는다. 멱살을 움켜잡고 밑바닥까지 끌고가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도록 강요한다. 그 강요, 매우 중독적이라서 외면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비밀의 숲> 속 살인사건은 일종의 계기다. 드라마에 특임팀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확인할 수 있다. 살인범을 잡기 전에 그 살인이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아주 먼곳의 비리부터 파헤치기 시작하는 황시목(조승우 분)의 행동은 살인자의 의도와 일치한다. 파문이란 줄의 끝을 부여잡고 꾸역꾸역 올라와 다시 한 번 모든 걸 뒤집으려 준비하는 황시목의 모습은 정말 저런 검사가 세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착각을 하게 할 만큼 추진력이 뛰어나다. 착각을 안겨준 황시목이 물리적으로 감정이 제거된 소시오패스라는 사실은 제작진이 의도한 아이러니다.


 황시목이 물리적 소시오패스로 설정된 덕분에 <비밀의 숲>은 인간이 얼마나 다면적 존재인지 알게 한다. 감정이 거의 없는 만큼, 그는 다른 등장인물의 감정을 거울이라도 되듯 비추어내며 드라마를 '양면성'이란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선역, 악역의 시대를 지나 양면적인 선역과 악역이 유행을 탔지만, 이제와선 양쪽 모두 지양받는다. 차라리 이야기의 줄기에나 집중하라고 말할 정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람이 '양면'이 아니라 '다면'이기 때문이다. 몹시 굴곡진 원형체라도 되는 마냥 '좋으면서도 나쁜 사람'이란 양면적인 단순화(?)가 불가능한데 자꾸 그걸 강요하니 부정적 의견을 불러올 수밖에. <비밀의 숲>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황시목을 매개체로 그런 것에서 벗어났다.





 살인자가 던진 돌 덕분에 <비밀의 숲> 속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황시목과 그의 팀원이 고군분투하자, '악의 축'이나 다름없던 검찰은 자신들의 평상시 악랄함이 아닌 다른 어느 측면에 숨겨져 있던 선함을 드러내며 '악랄하지만 그래도 나름 할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고백한다. 또한, <다크나이트>가 떠오를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 어느 캐릭터는 '충격적 반전'이 아닌 '더러운 희생'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모든 게 다 드러난 마지막 순간의 감정 동요가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수준일 수 있었다.


 살인자는 황시목이란 걸물이 분명하게 세상을 직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자신의 살인을 계기로 세상의 더러운 부분을 철저하게 까발리길 바랐다. 황시목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일을 해내갔다. 무감정하게. 살인자는 기쁨을 꾹 누르고 황시목을 심하게 핍박했다. 이 기묘한 동거는 추리와 별개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입증'조차 잊게 할 만큼의 감동을 지녔다. <비밀의 숲>은 그 동거의 끝, 결별에 이르러서야 감상자의 눈물을 허락한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는 끔찍한 순간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당신이 울어야 하는 순간이라고 넌지시 언급한다. 그 가르침이 건방지게, 혹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그 사실을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의 숲>엔 절대적 존재가 없다. 감정이 없다던 황시목조차도 예상치 못 한 상황에 허둥대기도 하고, 악역(?)들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면적인 인간의 본모습을 보고 기겁해 허둥댄다. 그래서 <비밀의 숲>이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