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어느 영리한 여성을 스파이 버전으로 꾸며낸 <안나>. 이미 자신 만의 세계로 필모그래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뤽 베송의 신작이다. <루시>를 재미있게 본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법한, 무언가에 심취한 작가주의 감독의 노빠꾸 질주가 <안나>에도 담겨있다. 이번에 뤽 베송이 심취한 건 사샤 루스라는 배우다.
<안나>의 예고편은 마치 <아토믹 블론드>처럼 꾸며졌는데, 영화 자체도 다소 닮아있다. 냉전에 벌어진 스파이 사이의 밀고 당기기와 삼중으로 장치한 트랩까지 어쩌면 <아토믹 블론드>의 영향을 받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차이점이 있다면, 살벌했던 냉전이 이제와선 찬란한 대중문화의 여명과 겹쳐, 낭만의 시대로 여겨진다는 점에 착안했던 게 <아토믹 블론드>고, 고통스럽던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하류 인생 끝자락에서 불구덩이에 빠져야 했던 인민의 지옥 탈출기를 '사샤 루스'라는 배우에 투영해낸 게 <안나>다. 즉, <아토믹 블론드>는 세상에 심취했고, <안나>는 개인에 심취했다.
<안나>는 뤽 베송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PC하다. 최근의 유행을 어설프게 쫓은 게 아니라 뤽 베송은 데뷔 시절부터 그랬다. 뤽 베송의 영화엔 의도치 않은, 혹은 있어선 안 되는 계기로 밑바닥에 떨어졌다가 본인의 의지로 다시 올라가는 여성이 빈번하게 나온다. <안나>는 그런 뤽 베송의 여성 캐릭터 중에서도 꽤나 치열한 편에 속한다. 그런 안나의 '빌어먹을 인생'을 묘사하는데 집중하는 탓에 화려한 액션의 여성 스파이 영화를 기대한 사람들은 매우 실망할 것이다. 이 또한 철저한 스파이 영화였던 <아토믹 블론드>와 구분되는 요소다. (<아토믹 블론드>가 PC하지 않다는 얘긴 아니니 오해 마시길.)
다만, <안나>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다름 아닌 사샤 루스의 연기력이다. 뤽 베송이 완전히 몰입한 게 이해가 될 만큼 매혹적인 배우긴 하지만, 연기 경력이 부족한 그녀가 맡기에 '안나'란 역할은 너무 컸다. 사샤 루스가 문제가 아니라 뤽 베송이 안나를 너무 어려운 인물로 설정한 게 문제다. 이로 말미암아 영화는 중반부에 잠시 동안 자기 템포를 잃고 헤매는데, 여기서 잠깐 집중을 놓으면 후반에 몰입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